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진만이형이랑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을 보러 아트하우스모모에 갔다. 이화여대 안에 있는 극장인데 이대를 가보고 나서 내가 이대에 안와봤단걸 깨닳았다. 고등학생때 무슨 연주회 보러 한번 왔던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와보니 완전히 새롭다. 암튼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너무 좋았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지난번에 본 드라이브 마이카는 내가 그를 좋아했던 걸 후회하게 할만큼 엉망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모든게 완벽하더라. 그의 영화는 한마디로 하자면 말의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 속에 진실이 담겨있고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그가 그의 작업방식의 속살을 내비쳤던 것 그대로 끊임없는 대본읽기를 통해 배우가 말 속으로 스며든다. 해피아워 아사코에 이어 이번 우연과 상상은 언어가 어떻게 존재를 대체하는지 그리고 언어가 구축한 세상이 어떻게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말하고 보니 꼭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나서 스스로를 비판하며 논리적 탐구를 쓸 때 생각이나네. 아 물론 드러맞는 비윤 아님. 암튼 진심은 마음속에 있는게 아니라 말 속에 있다. 그래서 첫번째 에피소드에선 그걸 상상만하고 카메라에 담고 끝내고 두번째 에피소드에선 폭로되고 마지막에서는 모든 것이 폭로된 세상에서도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는게 아닐까. 영화보고 나와서 진만이형이랑 동시에 감동받고 벙쪄서 아무말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번엔 드라이브 마이카 같이 보고 몇시간이나 같이 욕했는데 말이다.

드라이브 마이카, 하마구치 류스케

작년에 보려다 못본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마이카를 드디어 오늘 보았다. 설 전날인데 다행히도 시네큐브가 아직 문을 열고 있더라. 덕분에 수십년째 건재하고 있는 영화관에 감사하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예상대로 좋았다. 그런데 90% 좋았는데 뭔가 봉합이 되지 않는 이상한 쇼트가 몇개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검색을 왕창 해보았는데 어딜 찾아보아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심지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감독과의 2시간 동안의 대담에도 잘 안나오더라. 나의 착각일까? 영화의 마지막 즈음 가후쿠가 자신의 드라이버인 미사키와 함께 북해도의 땅끝까지 찾아가 그녀의 집이었던 곳을 찾아가 보여준 연출은 정말 너무나도 기이했다. 그 쇼트가 나오기 전부터 내가 절대 이런거는 안나오겠지라고 나오지말라고 빌었던 모든 장면들이 압축적으로 다 나와버렸다. 내가 알기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연출을 하는 감독이 아니다. 왜 그 장면을 연극처음 해보는 청소년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극 중 연극감독인 가후쿠가 배우들에게 절대 감정을 넣지 말고 대사만 읽으라고 지시하는 것 마냥, 그래서 다른 배우가 왜 우리는 로보트처럼 연기해야하나고 반문하는 것 처럼) 그 중요한 장면을 어색한 로보트의 연기처럼 ‘일부러’ 연출했다(고 생각된다). 봉준호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 쇼트에 특별히 정성을 들여 잘 찍기 위해 이틀이나 소비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분명 그의 의도가 있는듯한데 봉준호 감독은 다른 리뷰에서 이동진 평론가도 그걸 질문하지 않고 드디어 둘이 마주보았다고만 해석을 하더라.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게 맞긴 한데. 여전히 그 연출과 대사들은 여전히 이상하다. 또 한 쇼트는 가후쿠가 윤수씨의 초대를 받아 그 집으로 가서 넷이서 식사를 하는 장면. 셋만 열심히 대화를 하고 미사키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이 앉아있는데 느닷없이 운전에 대한 칭찬을 하자 미사키는 갑자기 식사 도중 일어나 프레임의 아래로 사라진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미사키는 그 집의 강아지를 만지고 있다. 정말 어리둥절한 연출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에필로그. 누가봐도 당연히 가후쿠의 차라고 생각할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윤후씨의 집에 있던 강아지라고 생각할 강아지를 차에 태우고 시간의 흐름이 전혀 없음에도 (아내의 사망 이후에는 2년 뒤라는 자막을 친히 달아주었던 것에 비하면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녀는 한국으로 와있고 코로나 시대를 상징하듯 마스크를 쓰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건 어떻게 해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쇼트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의 그의 전작 아사코에서 보여주었던 무너져내려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근심의 연장으로 읽힌다. 글과 대사와 연기와 아내와 젊은 배우의 존재와 그리고 알지 못했던 이야기의 뒷편에 이르기가지 모든 것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연출되었다. 이런 정교한 연출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평론가들이 분석을 잘 해놓았더라. 그런데 문제는 이런 쇼트들의 균열. 유일한 추리는 가후쿠가 내켜하지 않던 운전수의 자리를 내어준다는거에서 비롯되는데. 그녀의 위치는 마치 신의 자리가 아닐까? 하는거. 굳이 신을 등장시키기 어렵다면 작가의 위치.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작품속 인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미사키가 직접 작품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일까? 그러니깐 애당초 코로나 시대에 한국에서 살고 있던 한 한국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를 한 것인가? 라는 상상. 평범한 여고생이 좋아하는 남학생의 빈집에 몰래 들어가는 사연에서 여고생이 침입자의 왼쪽눈을 찔러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후쿠 역시 녹내장으로 왼쪽눈이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니깐 이 극에서 침입자는 젊은 배우가 아니라 가후쿠 그 자신이다. 이렇게 극에서 가후쿠를 침입자의 위치로 옮겨놓고 나면 결국 극의 중심에는 미사키가 남게 된다. 사실 영화의 90%는 너무나도 감동적일 정도로 잘 만들어졌는데 몇몇 설명이 잘 되지 않는 이상한 쇼트들이 있어 한번 더 영화를 보아야 할 것 같다. 감독이 정답을 다 이야기해주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게 무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