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shinobu Kubota – La La La Love Song song by 백예린

백예린이 부른 la la la love song. 다들 잘 아는 키무라 타쿠라 주연의 1996년 작품인 롱 베케이션의 ost로 삽입되었었던 곡이다. 그런데 나는 원곡보다 백예린이 부른 이 곡이 열배는 더 좋더라. 그리고 그땐 모르고 드라마를 봤는데 다시 보니 마츠 다카코도 나오고 다케노우치 유타카도 나오고 히로수에 료코도 나온다. 근데.. 분명 재밌는데 그보다 더 눈에 띄는 뭔가 촌스러운 느낌. 분명 당시엔 엄청 트랜디함의 절정의 작품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드라마와 비교도 안되게 일본 드라마가 멋지던 시절) 이제는 정반대의 느낌이 드는거다. 올초에 봤던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도 똑같은 느낌이더라. 20대 초반에 볼 때는 멋지게 봤는데 다시 보니 촌스러운. 가끔 80년대에 방영되던 KBS TV문학관 같은거 볼때도 마찬가지다. 분명 검증된 좋은 스크립트임에도 그 보다는 옛날 텔레비전 브라운관의 사이즈에 맞춘 화면 프레임이 더 촌스럽게 보여진다. 와이드 스크린에 익숙해지다보니 그렇지 않은건 엄청 고루하게 느껴지는 현상. 도대체 촌스럽단건 뭘까? 새로운 자극에 오래 노출됨으로서 이에 대한 방어로 생겨나는 뇌의 생리적인 현상인걸까? 아예 오래되어 버리면 그러니깐 50-60년대.. 그건 또 아예 새로워보이는데 어정쩡하게 오래되면 그건 아주 진부해보이는거 말이다.

레지나 카터 – I’ll be seeing you

이번 주 내내 반쯤 감기몸살 걸린것 처럼 골골거리면서 보냈다. 백신주사도 안맞았는데 말이다. 분명 머리에 열나는 것 같은데 어디 들어갈때 체온 체크하면 정상이다. 내가 문제인건지 기계가 엉터리인건지. 오늘 저녁에도 머리 멍하고 몸이 으슬한 기운에 이마에 손대보니 열나는거 같은데 저녁에 미팅하면서 회의실 들어갈때 체온계 재보니 35도 나오던데. 뭔가 이상. 암튼 이번 주말은 잠이나 푹자고 밀린 음악이나 들으며 뒹굴거려야겠다. 뉴스를 들으니 이번 그래미 재즈부분에 레지나 카터가 후보로 올랐는데 상을 타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생각나서 다시 꺼내본다. 너무 아름다운 I’ll be seeing you. 니나 시몬 마냥 자기만의 템포로 너무나도 아름답게 연주한다…

슈베르트 – 현악사중주 C Major, 2nd movement

슈베르트가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즈음 작곡한 현악 5중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쓰여서 더욱 유명해졌다. 많은 이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장면들이 이리저리 변주되어 보여지는 걸 보고는 일상의 반복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건 좀 핀트가 나간 이야기. 마치 누군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 때 그 의도와 마음은 모른채 그저 뱉어진 단어들을 늘어놓고 인생의 비밀을 풀어보려는 헛된 시도 같다고나할까. 무언가 있어 보이나 결코 잡을 수 없는 것. 하지만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건 그런게 아니다. 영화에는 삶의 모든 순간 어떠한 순간에도 당신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그의 간절한 다짐 그러나 결국엔 놓을 수 밖에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죽음을 앞둔 슈베르트의 마음을 그 역시 느꼈으리라 생각.

키스 자렛 – It never entered my mind

한 십수 년 전, 그러니깐 911 테러가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뉴욕으로 보름쯤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911 광장의 새 건물이 완공되지 않았던걸 보면 사건이 터지고 그리 오래되진 않았던 때 같다. 몇군데 일부러 돌아다닌걸 제외하면 거기서도 별로 열심히 관광을 다니진 않았고 맨날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빈둥빈둥 했었다. 게스트하우스가 컬럼버스서클 근처였던터라 늦잠 자고 일어나서 근처 링컨센터에 있는 시네마테크에서 오후영화를 보고 밤에는 타임아웃뉴욕에 나온 당일 라이브하는 재즈바에 찾아가서 밤새 술을 마시고 공연을 보다 새벽에 숙소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인기 있는 재즈라이브 공연은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해야했고 나처럼 당일 예약을 하는 관광객은 인기공연 예약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찾아가게 되는 곳은 대부분 변두리 건물 지하 구석 초라하게 좁다랗게 만들어진 곳들이었다. 암튼 그날도 늦게 끝난 영화를 마무리하고 허기를 달랜 후 마음먹은 재즈바로 들어갔다. 라이브를 방금 막 시작하고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 총 3명이 거기 모인 사람의 전부였다. 내가 들어가니 모두들 날 바라보는데 왠지 당황스러웠다. 너무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순간 들어가지 말까 하다 그냥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때 그 곳에서 연주되고 있던 곡은 내가 좋아하는 It never entered my mind 였다. 떠나간 연인을 추억하며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냐며 자조하는 곡. 1940년대 로저스와 하트의 뮤지컬인 하이어하이어에 나왔던 곡인데 수많은 재즈연주자들이 리메이크를 한 명곡이다. 나 같은 경우는 마일즈 데이비스나 쳇베이커, 줄리 런던 같은 스타일의 연주만 주로 들었는데 당시 거기서 연주되던 곡은 키스 자렛의 편곡 같은 곡이었다. 중간부터 듣은데다 워낙에 딜레탕트적으로 연주를 하고 있던지라 무슨 곡인가 하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 이곡이 이곡이었구나’ 하고 깨닳았을 때의 짜릿함. 지적이고 예민한 스타일의 연주. 내 스타일은 분명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당시 뉴욕에서 들렀던 여러 재즈바에서의 많은 곡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게 뭐 연주가 좋아서였던건지 아니면 그 몇명 없고 비좁고 담배연기가 가득찼던 그 곳의 분위기가 좋아서였던건지 모르겠다. 한 이십년전 우리나라에 처음 재즈바 열풍이 몰아닥칠 때 여기저기 라이브 공연을 하는 재즈바가 우후죽순 생기고 라이브연주도 꽤나 많았던게 생각난다. 요즘은 다들 어디로 간건지 모르겠다. 이런걸 주변 어디에서 다시 들어볼 수 있을까..

Angelo Badalamenti – Cousins (영화 밀애 ost)

오랜만에 영화음악. 안젤로 발라멘티의 러브테마. 조엘 슈마허 감독의 1989년작 밀애에 나왔던 곡이다. 원제는 Cousins 사촌들인데 국내에는 밀애로 수입이 되었다. 요즈음의 영화들을 보면 번역하기 애매한 경우 그냥 원제를 그대로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80-90년대에는 확실히 원제와 아무 상관없이 제목을 짓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안젤로 발라멘티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블루벨벳, 광란의 사랑, 트윈픽스에서 음악을 맡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재밌는건 블루벨벳에 이제 막 출연했던 이자벨라 로셀리니가 바로 이 영화 밀애에서도 여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것.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딸로 우리에게 더 유명한 배우. 이 러브테마는 나중에 우리나라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테마곡에 표절시비가 있던 원곡으로 더 유명하다. 암튼 좋은 음악은 다시 들어도 좋다.

칙 코리아 – Spain played by Maike

얼마전 타개한 칙 코리아의 대표곡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들어가게 될 곡이 아마도 스페인이 아닐까? 미시시피의 지류와도 같은 거대한 마일스 데이비스에게서 독립해서 리턴 투 포에버 밴드를 만들고 Light As A Feather 라는 제목의 앨범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수록되어 있던 곡. 아랑훼즈 협주곡의 테마를 따와서 그 자장에서 전혀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 만의 개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곡이다. 사실은 지난 주말 비가 오는 통에 외출을 못했는데 (뭐 주말 내내 온 것도 아니지만 계속 게으르게 방바닥을 구르다가 마음을 먹었던 바로 그 순간 비가 왔었다) 봄이 더 가기 전에 이번 주는 인왕산을 가보려했는데 또 비가 내린다. 지난 주 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암튼 비오는 날 더 듣기 좋은 곡이긴 하다.

Stefan Nilsson – Towards the new world (영화 정복자 펠레 ost)

클리어파일을 몇 개 구입하러 서점에 딸린 문구점에 들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가판대에 놓인 엘레나 페란테의 신작 어른들의 거짓된 삶을 발견하고 냉큼 구입했다. 몇년 전 그 쪽 동네로 여름휴가를 간적이 있다. 그 때 문득 여행하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보며 여행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그녀의 나폴리 4부작을 구입했었고 그런 계기로 그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나폴리를 배경으로 작품을 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녀의 작품들이 꽤 인기를 끌었다. 나폴리 4부작에 이어 나쁜사랑 3부작이라는 이름으로도 소설들이 국내에 다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한길사의 아픔다운 책 표지들도 한 몫 한 것 같다. 소설들은 분명 어둡고 침침한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책표지는 반대로 햇살 가득한 아말피 감성으로 디자인 되어있다. 묘한 아이러니. 그러고보니 빌 어거스트 감독의 정복자 펠레 또한 떠오른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잔인한 세상에서 연약한 영혼이 유리벽을 깨고 나오는 이야기. 영화속에는 잔인한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져있다. 마치 우리들이 어렸을때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 뿌연 잿빛으로 미화되어 어렴풋이 남는 것 처럼 원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검정색과 잿빛과 푸루름 그리고 노을 빛 같은 눈부심들이 뒤섞여 있는 것들. 그렇게 따지자면 한길사의 아름다운 책표지들도 다 이유가 있는걸까? 아래 동영상은 영화의 중간 어디쯤. 주인공이 언덕에 앉아 바다를 떠다니는 배들을 바라보는 가슴 미어지는 장면.

Gluck – Melody from Orpheus for flute

아내를 잃은 오르페오가 비탄에 빠져 슬퍼하자 사랑의 신 아모르는 이에 감동하여 그에게 아내를 살릴 수 있는 비책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저승세계의 지배자인 플루토를 감동시키면 그녀와 함게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다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상으로 되돌아오기전 까지 뒤돌아 그녀를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붙인다. 이에 오르페오는 온갖 난관을 뚫고 지하세계로 내려가 플루토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시험을 통과한 그는 허락을 받고 드디어 에우리디케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기나긴 암흑의 계단을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오르페오가 변심을 했는지 의심이 들어 여러가지 질문을 하게되고 오르페오는 무심코 그녀를 뒤돌아 쳐다본다. 이에 에우리디케는 계단에서 미끄러져 지옥으로 떨어져 죽게되고 비통한 오르페오는 자살을 시도한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를 보면 어찌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사로잡힌 그리스의 비극이 연상된다. 그럼에도 오페라의 2막 정령들의 춤에선 비극을 연상키 어렵고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이후 클라이슬러는 이 아름다운 합주곡의 주제 부분을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했고 ‘글룩의 멜로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다. 여기 삽입한 동영상의 경우는 드물게도 원곡 처럼 플룻으로 연주된 경우. 흔치않은 연주이지만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가 가지고 있는 정서를 잘 표현하였다. 이 영상이 인상적인건 촬영 때문인데 일반인의 솜씨가 아닌 듯 하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마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다.

팻 메쓰니 – Are you going with me?

스노우캣이 아직도 블로그를 연재하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진짜 오래되었는데 대단하다. 내가 이십년도 더 전에 만들었던 겨울심장이라는 이름의 홈페이지 도메인은 말레이지아의 한 여대생이 자기 개인홈페이지로 가져가버렸다.사실 그 동안 만들었다가 폭파시켜버린 홈페이지나 블로그가 진짜 많은데 이 페이스북 계정만 해도 날려먹은게 다 합치면 십수번이 넘을꺼다. 전화번호도 한 열번 넘게 바꾸었지 않나 싶다. 뭐 별 이유는 없다. 그냥 뭔가 쌓아놓다 보면 알수 없는 무의식적 알력이 그걸 날려버리라고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다. 아직도 여전히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있나 보다 하하.

줄리안 브림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어릴때 음악잡지 객석에서 읽었던 어렴풋한 기억. 30년도 더 전 기억이라 그게 줄리안 브림의 이야기였는지 다른 기타리스트의 이야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무튼 그는 어린시절부터 세고비아의 후원을 받았고 성공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 그가 50세 때 즈음이었나 스포츠카를 몰고 과속을 하다 사고가 발생했고 크게 다친 그는 연주를 그만두고 은퇴를 하고 만다. 그렇게 스페인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머리를 이발하기 위해 기다리는 중 동네 청년이 기타를 들고 연주를 하는 것을 듣게 된다. 하지만 들어주기에 영 엉망이었던 연주를 듣던 그는 그자리에서 일어나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금 연주를 시작했다고한다. 그 때 그 음악을 듣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무튼 이후 활발한 음악생활을 다시 시작해 우리의 귀을 즐겁게 해주었고. 작년에 8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RCA에서 나온 이 음반은 93년에 발매되었는데 실제 녹음은 59년에 이루어졌다. 다들 이 곡을 연주할 때 서정적으로 연주하곤 하는데 담담한 그의 연주를 듣고 있자니 그는 라벨을 연주하는게 아니라 그 자신을 연주하는 듯 보인다.

쇼스타코비치 – Symphony no. 5 conducted by Mariss Jansons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에 이어서 두번째로 자주 들었던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일꺼다. 중학교 1학년 때 우연찮게 누나가 보던 전혜린의 수필집을 보게 되었고 그녀의 책속에 나오는 모든 책들, 영화들, 음악들을 다 보았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성장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산물들이 다 그 책 속에서 나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녀의 글에 헤르만 헤세에게 엽서 받은 이야기가 나와서 그의 책을 다 보고 페터 한트케나 토마스 만의 소설 이야기가 나와서 그들의 책을 다 보고 뭐 이런 식이랄까. 그러다 그녀의 책 속에 나온 곡 중 하나가 바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었다. 때 마침 집에서 엄마가 정기구독하던 객석이라는 음악잡지에 쇼스타코비치 특집이 실렸었는데 열심히 읽고 또 읽고했던 기억이 난다. 암튼 쇼스타코비치의 곡들은 뭐랄까 무슨 스릴러 영화에서 적들에게 쫓겨서 도망치다 강물속으로 몸을 던진 주인공이 추적자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물 위로 길다란 빨대를 뽑아 올리고 숨을 참으며 버티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물 바깥으로 나올 수 없는. 빨대 하나에 의지해 숨을 유지하는 그 1초 1초의 압박감과 답답함. 신경질적인 섬세함을 느끼게 해주는데 많은 현대인들이 공감할만한 감각이 아닐까 싶다. 우연찮게 그 때 구입한 시디가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한 EMI 앨범이었다. 오슬로 필하모니의 연주였는데 그가 훗날 더 거장이 되기 전에 초창기에 지휘한 앨범이었다. 유튜브에 검색해보니 녹음이 나오긴 하는데 EMI가 아니라 워너 음반으로 나온다. 어케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시 들어도 너무 좋다. 하도 많이 들어서 정말 오랜만에 듣는데도 모든 악기의 모든 음표 하나하나가 다 귀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