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만이형이랑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을 보러 아트하우스모모에 갔다. 이화여대 안에 있는 극장인데 이대를 가보고 나서 내가 이대에 안와봤단걸 깨닳았다. 고등학생때 무슨 연주회 보러 한번 왔던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와보니 완전히 새롭다. 암튼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너무 좋았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지난번에 본 드라이브 마이카는 내가 그를 좋아했던 걸 후회하게 할만큼 엉망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모든게 완벽하더라. 그의 영화는 한마디로 하자면 말의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 속에 진실이 담겨있고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그가 그의 작업방식의 속살을 내비쳤던 것 그대로 끊임없는 대본읽기를 통해 배우가 말 속으로 스며든다. 해피아워 아사코에 이어 이번 우연과 상상은 언어가 어떻게 존재를 대체하는지 그리고 언어가 구축한 세상이 어떻게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말하고 보니 꼭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나서 스스로를 비판하며 논리적 탐구를 쓸 때 생각이나네. 아 물론 드러맞는 비윤 아님. 암튼 진심은 마음속에 있는게 아니라 말 속에 있다. 그래서 첫번째 에피소드에선 그걸 상상만하고 카메라에 담고 끝내고 두번째 에피소드에선 폭로되고 마지막에서는 모든 것이 폭로된 세상에서도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는게 아닐까. 영화보고 나와서 진만이형이랑 동시에 감동받고 벙쪄서 아무말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번엔 드라이브 마이카 같이 보고 몇시간이나 같이 욕했는데 말이다.
Month: June 2022
당신 얼굴 앞에서, 홍상수
오즈의 1929년작 단편 무성영화 ‘대학은 나왔지만’을 보는데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는 대화에 관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서 대화란 대화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운드의 뉘앙스, 타인의 목소리도 중요한하다. 그런데 무성영화는 그것이 빠져있다. 사람의 목소리를 빼앗아 텍스트화 시키고 구어체를 스크린으로 보여준다음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건 인물과 인물의 대화일까 또는 텍스트와 텍스트의 대화일까 그것도 아니면 쇼트와 쇼트의 대화일까. 영화는 그 자체가 쇼트와 쇼트의 대화. 그러면서 동시에 무성영화는 문자와 문자의 대화다. 확실히 무성영화는 지금의 영화보다 형식적으로 해체되어 있고 대상화 시키기 좋아서 여러 생각이 든다. 보면서 초창기에도 여전한 오즈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오즈의 영화에서 대화란 그의 쇼트 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정말 이상한게 그의 영화는 쇼트를 다 자르고 대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 놓고 결국에 인간은 혼자라는 것만 남겨놓아도 나중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보면 다 정겹다. 반복되는 인물들이 다른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면 반갑다. 오즈 영화의 대화들은 갈등하고 싸워도 결국에 서로가 서로에게 한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위로와 연민을 느끼게 한다. 오즈 영화의 숭고함은 내용이 아니라 삶의 외로움을 가운데 놓고 펼쳐지는 이 위로와 연민의 끝없는 대화의 반복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과 반대편에 서 있는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들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이것을 전제로 시작했다. 그의 영화의 대화들은 다 혼잣말이다.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는 대화가 아니다. 연민 같은건 테이블에 놓여진 재털이나 술병에 더 있는 것 같다. 어떤 에피소드가 반복되고 반복된 후 거기에 남는 이상한 감정. 영화의 인물들이 대화를 하는데 내용은 텅 비고 이상한 찌꺼지만 남는다. 그동안 우리는 이 찌꺼기를 예술이이라 명명하고 빠르게 봉합했다. 그런데 모두가 말하듯이 홍상수의 요즘 영화는 그렇지가 않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당황스럽게도 감동적이고 거룩하다. 영화에서는 반복적으로 이혜영이 독백으로 기도를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 독백이 이혜영의 마음이라면 마음의 심상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는 이혜영의 시선을 보여주거나 풍경을 보여주거나 행위를 보여주거나 해야 하는데 카메라는 집요하게 이혜영의 얼굴만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감독은 기도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찾고 싶은거다. 신의 응답을 보고 싶은거다. 나는 홍상수 영화에서 이혜영이 계속 기도를 할때 이것이 기도라는 신과의 대화에 대한 조롱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잠시 당황했다. 그러다 불현듯 창밖으로 들리던 엄마와 어느 소녀의 가위바위보. 그 다음 그 소녀가 갑자기 이혜영 얼굴 앞에서 하는 대사를 나눌때 그것이 진심이란것을 깨달았다. 이혜영이 자신이 어릴적 살던(지금은 샵으로 개조된) 이태원의 집에 들러서 ‘마음속의 기억들은 너무 무겁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안살겁니다. 제 얼굴 앞을 보게 하고서’ 라고 기도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엄마와 가위바위보를 하던 소녀가 이혜영의 얼굴앞에 나타난다. 왜 그 소녀일꺼라 생각을 했냐하면 가위바위보를 하던 소녀와 엄마의 대화는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들은 적 없는 행복이 들렸기 때문이다. 마치 환청처럼 들리기 까지 했다. 그 다음 그 소녀가 이혜영의 얼굴앞에 마법처럼 나타나는데 이상한 대화를 한다. “인천에 살아?””네””그럼 여긴(이태원) 놀러온거야?””아뇨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인천에도 집이 있고?” “아뇨.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어. 그렇구나.” 그 다음 이혜영은 소녀를 감싸안는다. 여기서 소녀는 이혜영의 얼굴앞에 나타난 신의 응답. 이혜영의 영화속 어린시절 집은 이태원이고 실제 이혜영이 어린시절 자란곳은 인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혜영은 자신의 무거운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감싸 안아주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혜영에게 그것을 선물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중반에서 끝날때까지 소설이라는 까페에서 권해요와 이혜영이 30분간 대화를 나눌때 집요하게 이혜영의 얼굴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감동적이다. 배우들은 여전히 다른영화들처럼 자신을 만들고 포장하는 말들을 하고 대화는 비어있고 행동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데 카메라는 끝내 얼굴을 바라본다. 다음날 이혜영이 눈을뜨고 권해요가 ‘여행가서 영화를 찍자는 약속은 지킬수 없는 것’이라는 응답을 받자 이혜영이 웃기 시작한다. 난 이 웃음이 살인하지말라에서 주인공의 구토가 인간을 향한 신의 구토이듯 키에슬롭스키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대화에 대한 신의 비웃음 처럼 들렸다. 그리고 라스트씬의 느닷없는 신의 강림. 아니 홍상수의 영화를 브레송도 아니고 이렇게 읽어도 되는건지 모르겠다. 처음 글을 쓰기시작할때는 오즈의 반대편에서 반복되는 대사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찌꺼기만 남는다고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신의 강림까지 도달했다. 연민없는 사람들의 대화와 관계에서도 구원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