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노 고도, 와카야마
와아캬마는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오사카로 올라가지 않고 바로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다들 많이 가는 오사카나 교토보다 가까운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산지인데다가 사찰들을 제외하면 매력적인 관광지가 많지 않아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와카야마가 매력적인 이유는 다름아닌 바로 그 산과 사찰들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지역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연히 본 고야산에 대한 글 때문이었다. 우리로치면 신라에서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일본 헤이안시대에 구카이 스님이 일군 이 곳은 일본불교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다. 산속에 매우 큰 규모의 사찰들이 가득하고 덕분에 과거로부터 많은 이들이 수행을 위해 이곳으로 향했고 덕분에 이들이 걸었던 수행길이 오늘날까지도 유명하다. 가장 전통적으로 유명한 길은 교토에서 출발하여 타나베로 들어와 시작하는 나카헤치.
마라톤 러닝 페이스
백악산
우리에게는 북악산이라는 이름이 좀 더 친숙한데 원래 이름은 백악산이라한다. 9월부터는 하절기가 끝나 청와대옆 칠궁쪽 입구는 오후 4시부터 통제를 하고 있다. 할 수 없이 창의문쪽에서 접근. 트레일러닝을 한다고 올랐는데 뛰기는 커녕 걸었던 구간이 훨씬 더 많았던 듯 하다. 이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더라. 그래도 백악마루도 올라보고 청운대도 오르니 말로만 듣던 풍경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바깥에서 볼 때는 백악산이 그리 높은 산도 아니고 조그맣게 보였는데 막상 산에 오르니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매우 조그맣게 보인다. 재미난 경험.
달리기
달리기를 시작했다. 빨리 달리기 보다는 오래 달리기에 관심이 생겼는데 달리기와 관련한 여러 글을 보다보니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느리게 달리는게 중요하다고 한다. 최대 심박수에서 70% 정도의 강도로. 이른바 존2 라고 불리우는 구간을 유지하면서 달리라는거. 그런데 러닝을 좀 하던 사람들이야 가볍게 조깅을 하는 정도로 충분할텐데 나 같이 평소 운동을 안하던 사람이 그 정도 강도만 유지하려니 달리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지나치게 느린 속도가 나와버리더라. 아무튼. 이리 지속하다보면 몸이 좀 더 건강해지려나.
석종
석종
서울 마포구 동교로27길 3-14 1층
010-3982-9525
조용하고 우아한 집. 홍대 뒷골목에 작은 단독에 위치하고 있는데 메인홀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고 좌석은 몇개 되지 않는다. 그런데 쉐프분이나 집의 인테리어나 심지어 맛까지. 하모니가 있는 집이다. 스시들이 나올 때 마다 하나하나가 너무 튀지 않고 전체적으로 톤이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생선들마다 발효 기간을 조금씩 달리해서 모든 스시들이 입안에서는 비슷한 정도의 식감을 보여주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재미난 경험이었다. 전체 코스 중 최고는 고등어. 단 하나만 나온다는게 어찌나 아쉽던지.
가미고치, 나가노
가미고치를 대중교통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마쓰모토에서 신시마시마역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 그리고 타카야마에서 히라유온센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물론 드물지만 다른 더 먼도시에서 장거리 버스를 타고 들어가는 방법도 있다 (eg. 도쿄 신주쿠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 가미고치는 개인 자가용이나 렌트카 접근은 안되며 이런 교통수단을 이용한 분들은 모두 사완도 터미널이나 히라유 터미널에 주차를 해두고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아래는 마쓰모토에서 가미고치로 들어가는 버스 시간표이다. 마지막 떠나는 교통편이 3시반 이전에 끝나므로 애매하게 오후에 마쓰모토에 오면 자칫 당일 가미고치에 가지 못하는 수가 있으니 시간표를 잘 확인해야한다. 이 지역은 신호타카 로프웨이 그리고 노리쿠라산 등 관광지가 많은 편이라 교통편이 제각각이라 방향을 잘 체크해야한다.
가미고치로 들어가는 버스는 타이쇼호수 부근에서 잠시 정차를 하고 목적지인 가미고치 버스 터미널로 직행한다. 터미널에서 가미고치의 중심이 되는 갓파바시 까지는 5-10분이면 당도할 거리이지만 이 지역은 모두 비포장길이니 혹시라도 캐리어를 끌고 왔다면 운반하기가 편하지는 않다. 등산을 하지 않고 단순 하이킹만 한다면 가미고치는 크게 타이쇼호수에서 갓파바시까지, 갓파바시에서 묘진산장과 묘진호수까지, 그리고 묘진산장에서 도쿠사와까지, 그리고 도쿠사와에서 요오코 산장까지 크게 4지역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타이쇼 호수에서 요오코까지는 매우 완만한 오르막인데 거의 평지라 볼 수 있고 다만 돌아올 때는 한결 더 편하게 올 수 있다. 요오코 산장에서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으나 오후 3시경에 식사는 더이상 제공하지 않으니 늦게 도착한다면 식사는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묘진 호수의 경우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야 하는데 오후 5시경 문을 닫기 때문에 오후 늦게 들어오면 입장이 어렵다. 갓바바시 양쪽으로 있는 롯지에서는 1층 레스토랑이나 샵에서 식사도 제공하고 등산용품이나 기념품을 구입할수도 있다. 또한 도쿠사와 산장의 경우도 오후 늦게까지 식사를 제공하니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도쿠사와나 요오쿠에서 동쪽으로 있는 조가다케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이 곳은 일본 알프스를 마주보는 매우 조망이 좋은 산이나 경사가 심해 난이도가 제법 높은 산이다. 요오코에서는 일본 알프스의 핵심인 호타카다케로 오르는 유명한 등산길이 있다. 특히 가을에는 단풍으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다. 이 등산로 중 중간에 있는 가라사와 산장 까지는 전문적인 등반장비가 없더라도 누구라도 시간만 들이면 오를 수 있는 멋진 곳이다. 산장에서 숙박도 가능하며 산장 주변에는 많은 백패커들이 텐트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미고치에서 타이쇼 호수에서 요오코 까지는 누구나 편하게 하이킹 할 수 있는 지역이라 보면 되고 요오코에서 가라사와 산장 까지는 우리나라의 등산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이상은 제대로 준비하고 올라야하는 본격적인 등반지역이라 보면 된다.
락 블랑, 샤모니
몽블랑산의 맞은편에 있는 브레방 전망대는 거대한 몽블랑을 마주볼 수 있는 곳으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하지만, 여기서 단순히 몽블랑만 바라보지 말고 산맥을 따라 하이킹을 하면 뚜르드몽드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라 플레제르 산장을 거쳐 락 블랑 호수에 당도하는 멋진 루트를 걸을 수 있다. 이 루트가 너무 길다고 여겨지면 샤모니에서 1번 버스를 타고 10분쯤 이동하면 당도하는 레 프라즈 마을에서 케이블카를 통해 바로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산으로 오르면 1894미터 높이의 플레제르 산장에서 몽블랑을 조망할 수 있다. 또, 여기서 체어 리프트를 타고 2397미터 높이의 인덱스까지 올라가 하이킹을 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 인덱스에서 락블랑으로 가는 루트는 여름이 아니라면 얼음이 채 녹지 않아 살짝 위험한 구간이 있을 수 도 있으나, 완만하게 내려가는 코스라 초심자라도 편안하게 4시간이면 왕복을 할 수 있다.
샤모니 몽블랑
스파카나폴리
스파카나폴리
서울 마포구 양화로6길 28 2층
02-326-2323
한 입 먹는 순간 사로잡히고 말았다. 피자를 이렇게 프레시하게 만들다니. 맛있다 없다를 떠나서 그냥 집에서 먹는 백반 같은 자연스러운 맛이다. 한 껏 멀리서 찾아가서 오랜시간 기다려 먹는 맛으로는 이게 뭐냐 그냥 평범하잖아 할지 모르겠으나, 먹고 먹고 또 먹어도 질리지 않는 주식으로서의 피자라는 점에서본질에 충실했다. 암튼 토마토를 어찌 이리 신선하게 잘 뽑았을까 궁금하다. 또, 도우도 올리브유를 바른 듯한 맛임에도 부푼 모양이나 색을 보면 또 아닌 것 같고. 암튼 조리법이 궁금해지는 피자였다.
안라쿠지, 우에다
신칸센에 지나는 우에다역에서 작은 사철인 벳쇼선을 타면 30분 정도 걸려 시내에서 10km 정도 떨어진 종점의 무인역 벳쇼온센역에 도착한다. 이 벳쇼온천은 나가노현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고 일본 서기에도 등장할 정도인데 나라시대에서 헤이안시대 넘어가는 시기 즈음 형성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지금은 쇠락한 낡은 온천 마을이지만 이 지역에는 놓치면 안될 중요한 국보 목탑과 중요문화재 건축물이 여럿있다. 아무튼 이 벳쇼온천지역에서 꼭 들러야하는 곳 하나를 꼽자면 바로 일본 유일의 팔각삼층목탑이 있는 안라쿠지라는 절. 천장에서 기단까지 18미터가 넘는 이 목탑은 1290년 무렵. 가마쿠라 시대에 세워졌다고 한다. 수백년이 넘는 시간 비와 눈을 맞으면서 현재까지 멋지게 서 있는 목탑의 모습은 숭고하기 그지 없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는 이 곳에 올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꽃의왈츠를 집필했다던 린센로 카시와야 벳소 료칸에 묵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문을 닫아 이용할 수 없었다. 대신, 하나야라는 대형 료칸에 묶었는데 료칸 전체가 문화재처럼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흔한 관광지는 아니고 우리가 갔을 때도 사람이 별로 보이지 않은 다소 을시년스런 분위기였음에도 마을이 가지고 있는 오랜 역사와 고풍스러운 느낌이 참 좋았다.
마르모레 폭포, 테르니
움브리아주는 로마에서 피렌체로 올라가는 길 중간 즈음에 위치한 내륙지역인데 그래서인지 주의 이름도 배꼽의 어원을 따서 지은 것이 재미있다. 이 곳은 수만년전 화산과 함께 형성된 지질학적 이상의 영향으로 침식작용에서 살아남은 산 위에 형성된 작은 마을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로마에서 북쪽으로 차도를 따라 달리다보면 관문역할을 하는 도시 오르떼에 당도하는데 이전만 해도 평지이던 주변 풍경이 갑자기 산위에 형성된 도시들로 황홀해진다. 여기서 조금 더 동쪽으로 달리면 테르니에 당도하는데 여기에는 마르모레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폭포가 하나 있다. 이 폭포는 고대 로마시대에 이곳을 지나던 벨리노강의 물들이 저지대로 흡수되며 말라리아등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 반복되자 서기 271년 집정관 만리우스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물길을 돌려 서쪽 마르모레 쪽 절벽으로 흐르게 하였고 이것이 폭포의 시작이 되었다. 원래의 폭포의 규모는 모르겠으나 현재는 인공수로 수력발전과 함께 관광객을 위해 특정시간에만 개방하여 폭포물을 흘려보낸다고 한다. 그래서 높이가 총 165미터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폭포이다. 폭포의 북쪽에 위치한 입구에서 보면 정말 시원할 정도의 장관인데 폭포를 위에서 보려면 걸어올라야하는 거리가 만만치 않다. 버스나 차를 타고 산을 빙 돌아서 올라가면 폭포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장관이라 꼭 높치지 않았으면 한다. 주변은 모두 평화로운 공원인데 가족단위로 모인 사람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는게 마냥 좋아 보이더라.
장 뤽 고다르
가디언 기사를 통해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가장 빠른 기사가 한 시간 전에 속보로 나왔고, 가디언의 기사는 30분 전에 나왔다. 기사는 그의 출생부터 1960년대 첫 작품 ‘네멋대로해라’를 거쳐 2018년 ‘이미지북’까지를 다루고 있다. 준비해둔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요 일간지에서 이렇게 한 분야에 대해 단시간에 정리해서 기사를 송고할 수 있다는 게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스마트폰으로 보는 우리나라 뉴스들은 대부분 연합뉴스 복사 붙이기 아니면 외신의 구글번역인 경우가 많다. 왜 우린 그렇게 못하나 하고 아쉬울 때가 많다.
고다르 하면 나의 철없고 정신없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내 대학교 신입생시절 그러니깐 90년대 중반쯤에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는 책이 인기가 있었다. 김홍준 감독이 고다르의 영화제목을 본떠 구회영라는 가명으로 낸 책이었는데 당시 진지한 아마추어들의 필독서였다. 그 때 고다르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듯 하다. 그 때만 해도 종일 하는 일이란 음악 듣고 술 마시고 영화 보는 게 전부였다. 예전에 범일동 블루스의 김희진 감독이 진행하는 영화사 수업에서 고다르의 첫 영화 ‘네멋대로해라’의 첫 시퀀스가 주인공이 마르세유를 떠나면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장면의 의미와 누벨바그에 대한 설명을 듣던 때가 생각난다. 내가 영화를 참 좋아하던 시절이었다. 암튼 그의 초기작은 비교적 잘 이해되는 편인데, 60년대 중반에 들어서 ‘메이드인 USA’,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주말’ 등을 거치며 그의 영화는 점점 정치적이 되어갔고 테크닉적으로도 난해해졌다. 그리곤 80년대 작품인 ‘미녀갱 카르맨’ 즈음부터는 영화에서 음악, 카메라, 서사를 분해하고 각자 따로 앙상블을 만들어 놀게 하는 등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한 현대미술 탐구란 생각이 들게 바뀌었다. 이후로 그는 대중과는 좀 멀어진 듯하다. 하지만 90년대 ‘누벨바그’, ‘포에버 모차르트’ 같은 작품으로 여전히 건재를 과시했다.
예전에 진만이형이랑 아녜스 바르다의 유작 ‘아네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본 기억이 난다. 죽음이 가득 찬 영화 그리고 사랑의 메시지를 가득 담은 영화였다. 영화 마지막 즈음 바르다는 스위스의 호숫가에 있는 고다르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만나지 못하고 아쉬워한다. 그 쇼트가 유독 기억에 남아있다. 언젠가 서울시네마떼끄에서 그의 회고전을 대대적으로 다시하길 바란다. 나의 스무살 시절로 돌아가 밤새 그의 영화를 탐독하고 싶다. 시간이 흐르니 내가 사랑하는 감독들이 하나 둘 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반면 영화를 예전처럼 많이 안 보니 새롭게 알게 되는 감독들이 이제는 잘 없다. 뭔가 잘 채워놓은 곳간이 점점 줄어들고 그럴수록 희미해져가는 것들을 힘주어 움켜잡고 있는 그런 기분이다.
Toshinobu Kubota – La La La Love Song song by 백예린
백예린이 부른 la la la love song. 다들 잘 아는 키무라 타쿠라 주연의 1996년 작품인 롱 베케이션의 ost로 삽입되었었던 곡이다. 그런데 나는 원곡보다 백예린이 부른 이 곡이 열배는 더 좋더라. 그리고 그땐 모르고 드라마를 봤는데 다시 보니 마츠 다카코도 나오고 다케노우치 유타카도 나오고 히로수에 료코도 나온다. 근데.. 분명 재밌는데 그보다 더 눈에 띄는 뭔가 촌스러운 느낌. 분명 당시엔 엄청 트랜디함의 절정의 작품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드라마와 비교도 안되게 일본 드라마가 멋지던 시절) 이제는 정반대의 느낌이 드는거다. 올초에 봤던 이와이 순지의 4월 이야기도 똑같은 느낌이더라. 20대 초반에 볼 때는 멋지게 봤는데 다시 보니 촌스러운. 가끔 80년대에 방영되던 KBS TV문학관 같은거 볼때도 마찬가지다. 분명 검증된 좋은 스크립트임에도 그 보다는 옛날 텔레비전 브라운관의 사이즈에 맞춘 화면 프레임이 더 촌스럽게 보여진다. 와이드 스크린에 익숙해지다보니 그렇지 않은건 엄청 고루하게 느껴지는 현상. 도대체 촌스럽단건 뭘까? 새로운 자극에 오래 노출됨으로서 이에 대한 방어로 생겨나는 뇌의 생리적인 현상인걸까? 아예 오래되어 버리면 그러니깐 50-60년대.. 그건 또 아예 새로워보이는데 어정쩡하게 오래되면 그건 아주 진부해보이는거 말이다.
편혜영
뭐 그런게 있다. 매우 점잖고 고지식한 어떤 사람이 알고보니 어린 시절엔 천둥벌거숭이같이 까부는 아이였다는 이야기. 신기한게 어린시절의 어떤 특성들은 스스로 그러했었는지 기억지 못하고 증발해버린다. 작가 편혜영도 그렇다. 분명 ‘아오이 가든 이나 ‘재와 빨강’ 시절만 해도 정리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이 질척이며 쏟아져나와 우리를 적셔버렸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전혀 다른 포지션에서 글을 쓰고 있다. 비교적 근작인 단편 ‘술과 농담’만 보더라도 그렇다. 이 작품이 초기작이고 시간이 흘러 ‘재와 빨강’ 그리고 ‘아오이 가든’에 당도했다는 식이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 작가의 시간은 반대로 흐르는 걸까? 평범한 소시민이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점차 문명을 벗어던지는 스토리가 아니라 반대로 문명사회에 원시인이 떨어져 세상을 놀라게 하고 시간이 흐르며 현대인의 시선으로 원시를 바라본다고나 할까. 이걸 성장이라 할지 변신이라 할지 모르겠다. 암튼. 가끔 어떤 사람들은 서서히 성장해가곤 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이미 그 과정이 끝나있고 끊임없이 다른 정원들을 넘나들기도 한다. 사실 편혜영 작가를 좋아하게 된 건 38회 이상문학상 작품인 몬순 때문이다. 짧은 글 임에도 뜨겁고 컴컴한 늪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가는 느낌들. 마치 레이몽 라디게의 ‘육체의 악마’ 같달까. 끌로드 를르슈의 ‘남과 여’ 처럼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처럼. 밤은 캄캄하고 앞은 보이지 않고 그러나 그 안은 활활 타오르고. 이런게 참 좋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
주말에 진만이 형과 만나 목동 CGV에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을 봤다. 어찌하다 보니 가게 된 곳인데 백화점 1층 공사 탓도 있겠지만 사람도 너무 많고 혼잡스러운 통에 길을 잃고 한참을 헤맸었다. 나중에 이야기하는데 이제는 우리가 나이가 많아져서 마치 할아버지들이 스마트폰 사용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사람 많고 복잡한 곳을 어려워하게 되는 거라는 자조 어린 대화를 나눴었다. 다음엔 다시 이곳을 오지 않게 될 것 같다. 암튼 영화는 그냥 그랬다. 이건 뭐 취향을 타는 거라 어쩔 수 없는거다.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 두 개. 하나는 주인공 해준이 박정민씨가 연기한 산오를 뒤쫗는 장면. 내가 생각하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는 이 장면에서 나온다. 쇼트들을 연결하며 하늘 위에서 인물들을 보여주는 힘. 뽕을 좀 넣자면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이탈리아 여행의 마지막 장면 크레인 쇼트를 두고 신의 시선이라고 지칭한 에릭 로메의 평론처럼. 그는 운명 위에 놓인 인간들을 관조하는 듯 카메라로 담아내는데 일가견이 있다. 또 다른 장면은 살인의 비밀을 재구성하며 서래가 바위산을 올라가는 장면을 말러의 교향곡 5번 4악장과 함께 편집해서 보여주는 장면. 분명 기교의 과잉인데 그게 또 멋들어진다. 암튼 영화는 전체적으로 이렇게 이 장면을 보여줘야지 하는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이가 이걸 어떻게 봐줄까 신경쓰는 듯하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리고 온갖 상징과 은유를 몰아넣고 퍼즐맞추기 1000피쓰 짜리 선물세트처럼 영화를 포장한다. 그런데 또 관객들에게 그걸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준다. 그러니 여기서 드는 생각은. 그럼 애당초 그렇게 하지 말고 스트레이트 하게 보여주면 되는거 아닌가? 근데 또 이런 생각은 로코코 장식을 보고 아르누보 장식을 보고 장식을 왜 넣나? 같은 쓸데 없는 비판이라 별 의미가 없다. 그냥 취향차이일 뿐.
우연과 상상, 하마구치 류스케
진만이형이랑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을 보러 아트하우스모모에 갔다. 이화여대 안에 있는 극장인데 이대를 가보고 나서 내가 이대에 안와봤단걸 깨닳았다. 고등학생때 무슨 연주회 보러 한번 왔던 것 같은데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막상 와보니 완전히 새롭다. 암튼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은 너무 좋았다. 올해 본 영화 중 최고. 지난번에 본 드라이브 마이카는 내가 그를 좋아했던 걸 후회하게 할만큼 엉망이었는데 이번 작품은 모든게 완벽하더라. 그의 영화는 한마디로 하자면 말의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말 속에 진실이 담겨있고 존재는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다. 그가 그의 작업방식의 속살을 내비쳤던 것 그대로 끊임없는 대본읽기를 통해 배우가 말 속으로 스며든다. 해피아워 아사코에 이어 이번 우연과 상상은 언어가 어떻게 존재를 대체하는지 그리고 언어가 구축한 세상이 어떻게 서로를 치유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말하고 보니 꼭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를 쓰고 나서 스스로를 비판하며 논리적 탐구를 쓸 때 생각이나네. 아 물론 드러맞는 비윤 아님. 암튼 진심은 마음속에 있는게 아니라 말 속에 있다. 그래서 첫번째 에피소드에선 그걸 상상만하고 카메라에 담고 끝내고 두번째 에피소드에선 폭로되고 마지막에서는 모든 것이 폭로된 세상에서도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는게 아닐까. 영화보고 나와서 진만이형이랑 동시에 감동받고 벙쪄서 아무말 없이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지난번엔 드라이브 마이카 같이 보고 몇시간이나 같이 욕했는데 말이다.
당신 얼굴 앞에서, 홍상수
오즈의 1929년작 단편 무성영화 ‘대학은 나왔지만’을 보는데 오랜만에 보는 무성영화는 대화에 관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영화에서 대화란 대화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사운드의 뉘앙스, 타인의 목소리도 중요한하다. 그런데 무성영화는 그것이 빠져있다. 사람의 목소리를 빼앗아 텍스트화 시키고 구어체를 스크린으로 보여준다음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건 인물과 인물의 대화일까 또는 텍스트와 텍스트의 대화일까 그것도 아니면 쇼트와 쇼트의 대화일까. 영화는 그 자체가 쇼트와 쇼트의 대화. 그러면서 동시에 무성영화는 문자와 문자의 대화다. 확실히 무성영화는 지금의 영화보다 형식적으로 해체되어 있고 대상화 시키기 좋아서 여러 생각이 든다. 보면서 초창기에도 여전한 오즈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오즈의 영화에서 대화란 그의 쇼트 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정말 이상한게 그의 영화는 쇼트를 다 자르고 대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 놓고 결국에 인간은 혼자라는 것만 남겨놓아도 나중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보면 다 정겹다. 반복되는 인물들이 다른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면 반갑다. 오즈 영화의 대화들은 갈등하고 싸워도 결국에 서로가 서로에게 한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위로와 연민을 느끼게 한다. 오즈 영화의 숭고함은 내용이 아니라 삶의 외로움을 가운데 놓고 펼쳐지는 이 위로와 연민의 끝없는 대화의 반복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과 반대편에 서 있는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들이다. 이 글을 쓰는 것도 이것을 전제로 시작했다. 그의 영화의 대화들은 다 혼잣말이다. 상대의 마음을 바라보는 대화가 아니다. 연민 같은건 테이블에 놓여진 재털이나 술병에 더 있는 것 같다. 어떤 에피소드가 반복되고 반복된 후 거기에 남는 이상한 감정. 영화의 인물들이 대화를 하는데 내용은 텅 비고 이상한 찌꺼지만 남는다. 그동안 우리는 이 찌꺼기를 예술이이라 명명하고 빠르게 봉합했다. 그런데 모두가 말하듯이 홍상수의 요즘 영화는 그렇지가 않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당황스럽게도 감동적이고 거룩하다. 영화에서는 반복적으로 이혜영이 독백으로 기도를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이 독백이 이혜영의 마음이라면 마음의 심상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는 이혜영의 시선을 보여주거나 풍경을 보여주거나 행위를 보여주거나 해야 하는데 카메라는 집요하게 이혜영의 얼굴만을 바라본다. 말하자면 감독은 기도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신의 얼굴을 찾고 싶은거다. 신의 응답을 보고 싶은거다. 나는 홍상수 영화에서 이혜영이 계속 기도를 할때 이것이 기도라는 신과의 대화에 대한 조롱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잠시 당황했다. 그러다 불현듯 창밖으로 들리던 엄마와 어느 소녀의 가위바위보. 그 다음 그 소녀가 갑자기 이혜영 얼굴 앞에서 하는 대사를 나눌때 그것이 진심이란것을 깨달았다. 이혜영이 자신이 어릴적 살던(지금은 샵으로 개조된) 이태원의 집에 들러서 ‘마음속의 기억들은 너무 무겁습니다. 이제는 이렇게 안살겁니다. 제 얼굴 앞을 보게 하고서’ 라고 기도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엄마와 가위바위보를 하던 소녀가 이혜영의 얼굴앞에 나타난다. 왜 그 소녀일꺼라 생각을 했냐하면 가위바위보를 하던 소녀와 엄마의 대화는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들은 적 없는 행복이 들렸기 때문이다. 마치 환청처럼 들리기 까지 했다. 그 다음 그 소녀가 이혜영의 얼굴앞에 마법처럼 나타나는데 이상한 대화를 한다. “인천에 살아?””네””그럼 여긴(이태원) 놀러온거야?””아뇨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인천에도 집이 있고?” “아뇨.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어. 그렇구나.” 그 다음 이혜영은 소녀를 감싸안는다. 여기서 소녀는 이혜영의 얼굴앞에 나타난 신의 응답. 이혜영의 영화속 어린시절 집은 이태원이고 실제 이혜영이 어린시절 자란곳은 인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혜영은 자신의 무거운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감싸 안아주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혜영에게 그것을 선물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중반에서 끝날때까지 소설이라는 까페에서 권해요와 이혜영이 30분간 대화를 나눌때 집요하게 이혜영의 얼굴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감동적이다. 배우들은 여전히 다른영화들처럼 자신을 만들고 포장하는 말들을 하고 대화는 비어있고 행동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데 카메라는 끝내 얼굴을 바라본다. 다음날 이혜영이 눈을뜨고 권해요가 ‘여행가서 영화를 찍자는 약속은 지킬수 없는 것’이라는 응답을 받자 이혜영이 웃기 시작한다. 난 이 웃음이 살인하지말라에서 주인공의 구토가 인간을 향한 신의 구토이듯 키에슬롭스키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대화에 대한 신의 비웃음 처럼 들렸다. 그리고 라스트씬의 느닷없는 신의 강림. 아니 홍상수의 영화를 브레송도 아니고 이렇게 읽어도 되는건지 모르겠다. 처음 글을 쓰기시작할때는 오즈의 반대편에서 반복되는 대사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찌꺼기만 남는다고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신의 강림까지 도달했다. 연민없는 사람들의 대화와 관계에서도 구원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아오야마 신지
얼마전 아오야마 신지 감독이 별세하셨다. 어릴 때는 세상에 이런 놀라운 감독이 놀라운 작품이 있다니! 하는 발견의 연속이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알았던 이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걸 더 많이 목도하게 된다. 이번주 시간이 되면 유레카를 오랜만에 다시 한번 봐야겠다.
파스타 만들기
최근 파스타에 관심을 가지면서 거의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런 저런 파스타를 만들어먹었는데 온갖 재료를 다 시험해보면서 느낀거 정리.
0. (밀가루) 생파스타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건파스타랑 별반 차이가 없다. 굳이 꼽자면 계란맛의 차이랄까? 결정적으로 00밀가루는 반죽할때 너무 질척거려서 싫다. 난 식감이 좋은 세몰라가 더 좋더라. 안티모카푸토 추천.
1. (면) 사실 면은 삶는정도에 더 많이 좌우되고 생각보다 메이커에 따른 차이는 그에 비하면 미미하더라. 마르텔라 파스타 좋다고 추천받아서 먹어봤는데 차이는 잘 모르겠던데 (가격대비). 대체코, 룸모, 만치니 파스타면 다 좋다. 메이커 보다는 면 굵기를 자기 취향에 맞는게 더 중요할듯.
2. (토마토) 직접 구입해서 끓여서 껍질버리고 씨 버리고 갈아서 소스 힘들게 만들어봤자 수입 홀토마토 소스보다 맛이 없더라. 아무래도 우리나라 토마토의 한계인 것 같다. 쉽게 구할 수 있는 센토 홀토마토가 가장 무난하고 맛있다. 비앙코 디나폴리 홀토마토도 좋은데 주문하면 수입배송 시간이 너무 길다. 생으로 꼭 하고 싶으면 무조건 방울토마토. 다만 스테비아 토마토 써보니 맛이 넘 이상해짐.
3. (올리브유) 아무리 좋은걸 써도 베이스 소스 볶을 때 들어가는 올리브유는 나중에 별로 티가 안나더라. 그러니 초기에 쓰는 올리브유는 적당한거 쓰고 마지막 파스타 다 완성하고 위에 살짝 뿌려주는 올리브유는 좋은걸 쓰면 좋을 듯. 쿠팡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이리아다, 올리타리아 둘 다 좋더라.
4. (바질) 생바질은 필수. 벼라별 비싼 수입건조 바질 보다 생바질이 1000배는 향미가 강하고 맛있다. 비교가 불가. 다만 보관기간이 짧아서 자주 주문해야하는데 결국 집에 바질을 기르는게 정답. 요리할 때 따먹으면 된다.
5. (마늘) 일반마늘말고 서산이나 의성에서 나오는 한지마늘이 최고. 가운데 심지가 두꺼울 수록 특유의 향취가 잘 우러난다. 갈아놓은 마늘은 너무 강해서 다른 향을 다 덮어버리니 그냥 생마늘 그때그때 편썰기 해서 넣는게 좋더라. 근데 많이 넣으면 너무 꾸리꾸리해지니 소량만 넣는게 좋더라.
6. (치즈) 보통 그라노 파다노 치즈에 비해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는 고급이라 이야기를 하던데 둘의 향이나 맛의 차이를 분간하긴 쉽진 않더라. 특히나 메이커별 차이는 도무지 모르겠더라. 나는 그냥 파르네제 24개월 숙성으로 타협. 하지만 파르미지아노 계열과 페코리노 로마노의 차이는 확연하다. 카치오 에 페페 같은거 할 때는 파르미지아노 쓰면 아예 다른 요리가 된다.
7. (후추) 후추그라인더로 후추 갈아서 넣는거 말고 통후추째로 후라이펜에서 구워가지고 빻아서 먹는게 젤 맛있더라. 차이가 확연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관심가지고 보면 메이커별로 향미가 너무 많이 달라서 자기 취향찾는게 중요할듯.
8. (소금) 소금도 요리할 때 넣는건 맛차이를 잘 모르겠더라. 게랑드 소금 좋다고들 하던데 개인적으로는 소금 맛이 너무 약하고 요리할 때 넣으면 너무 많이 넣어야해서 비추. 나는 몰튼소금 박스에 든거 구해서 손으로 집어 넣는게 그라인더에서 갈아 넣는거 보다 편해서 좋더라. 태안자염이 좋다던데 넘 큰걸로만 팔아서 아직 시도 못해봤다.
9. (돼지고기) 무조건 관찰레. 판체타를 쓰는거랑 지향점이 좀 다른 것 같다. 지방의 양이 다르다. 근데 우리나라에서 수입되는 관찰레는 좋은게 없다. 판체타는 좋은게 꽤 많이 들어오는데. 관찰레 직접 숙성시켜볼까 싶긴한데 엄두가 안난다. 생베이컨 쓰는건 그냥 다른 요리 같음.
10. (버터) 버터 좋은거 쓰나 싸구려 쓰나 생각보다는 차이가 적은 것 같다. 빵에 발라먹을 때는 차이를 느낄지 모르겠는데 요리에 넣을 때는 그렇다. 프랑스에 유명한거 많긴 한데 나는 이태리 요리엔 이태리 버터 쓰는게 좋을 것 같아서 베피노 오첼리 사용. 버터가 이쁘다. 사보면 안다. 근데 사실 이것도 알프스 언저리에 있어서 프랑스랑 머가 다른가 싶긴하다.
11. (앤쵸비) 소금쓰는 것 보다 앤쵸비 쓰니깐 특유의 향미가 좋아서 이편이 더 맘에 들었다. 면 삶을 때만 소금 쓰고 이후에 간 하고 싶을 때는 앤쵸비를 아주 살짝 넣어준다. 델리시우스가 구하기도 편하고 맛도 좋다.
12. (월계수) 쿠팡에서 월계수 큰거 한통 사서 소스랑 버무릴때 2장정도 넣어주면 향미가 잘 베어남. 누가 면 끓일 때 넣으라고 하던데 그렇게 하면 넣었는지 안넣었는지 전혀 모르겠더라. 딜리셔스마켓이란 곳에서 온갖 향신료 싸게 팔던데 무난하고 좋더라.
13. (제스트) 가끔 레몬껍질 갈아서 넣어야할 때가 있는데 이게 소량만 필요한데다 레몬을 껍질 갈아내면서 레몬 제고 관리도 쉽지 않고 아무튼 번거롭다. 난 그냥 솔리몬 레몬즙으로 정착. 필요할 때 한두방울.
번외.
1. 보통 홀토마토캔이 800g 이라서 1회분량만 정량으로 빼서 넣기 어렵다. 업소같으면 큰 소스통에서 소스를 국자로 정량을 떠 낼텐데 그게 어려움. 개인이 집에서 요리할 때 가장 힘들게 하는 부분같다.
2. 20cm 사이즈의 스텐 후라이펜 사용하니깐 혼자 먹기 편하다. 집에서 3인분할 때는 28cm 짜리 쓰는데 늘 사이즈가 아슬한 느낌이다. 차라리 웍을 구입했으면 넘칠까봐 스트레스 덜 받고 요리할 것 같다.
3. 치즈 그라인더로 갈 때 아무리 조심해도 늘 바깥으로 치즈가루가 튄다. 이건 어케 하는 방법이 없나? 늘 지저분해짐.
4. 파스타면 전용 냄비는 절대 비추. 특히 안에 있는 망에 자꾸 면이 끼게 되고 청소하기도 귀찮다. 그냥 큰 냄비에 끓이는게 진리.
5. 파스타는 좀만 해보면 90점짜리 파스타 만들기는 쉽게 되는데 더 이상 맛있는걸로 만들긴 여간해선 쉽지 않은 것 같다. 이 이상은 정확한 계량과 타이밍 싸움 같은데 정말로 많은 수련이 필요한 듯 하다.
엔가쿠지, 가마쿠라
드라이브 마이카, 하마구치 류스케
작년에 보려다 못본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마이카를 드디어 오늘 보았다. 설 전날인데 다행히도 시네큐브가 아직 문을 열고 있더라. 덕분에 수십년째 건재하고 있는 영화관에 감사하며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영화는 예상대로 좋았다. 그런데 90% 좋았는데 뭔가 봉합이 되지 않는 이상한 쇼트가 몇개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검색을 왕창 해보았는데 어딜 찾아보아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심지어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봉준호감독과의 2시간 동안의 대담에도 잘 안나오더라. 나의 착각일까? 영화의 마지막 즈음 가후쿠가 자신의 드라이버인 미사키와 함께 북해도의 땅끝까지 찾아가 그녀의 집이었던 곳을 찾아가 보여준 연출은 정말 너무나도 기이했다. 그 쇼트가 나오기 전부터 내가 절대 이런거는 안나오겠지라고 나오지말라고 빌었던 모든 장면들이 압축적으로 다 나와버렸다. 내가 알기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절대로 이런 식으로 연출을 하는 감독이 아니다. 왜 그 장면을 연극처음 해보는 청소년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극 중 연극감독인 가후쿠가 배우들에게 절대 감정을 넣지 말고 대사만 읽으라고 지시하는 것 마냥, 그래서 다른 배우가 왜 우리는 로보트처럼 연기해야하나고 반문하는 것 처럼) 그 중요한 장면을 어색한 로보트의 연기처럼 ‘일부러’ 연출했다(고 생각된다). 봉준호와의 대담에서 그는 이 쇼트에 특별히 정성을 들여 잘 찍기 위해 이틀이나 소비했다고 이야기를 했다. 분명 그의 의도가 있는듯한데 봉준호 감독은 다른 리뷰에서 이동진 평론가도 그걸 질문하지 않고 드디어 둘이 마주보았다고만 해석을 하더라.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게 맞긴 한데. 여전히 그 연출과 대사들은 여전히 이상하다. 또 한 쇼트는 가후쿠가 윤수씨의 초대를 받아 그 집으로 가서 넷이서 식사를 하는 장면. 셋만 열심히 대화를 하고 미사키는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이 앉아있는데 느닷없이 운전에 대한 칭찬을 하자 미사키는 갑자기 식사 도중 일어나 프레임의 아래로 사라진다. 카메라가 움직이면 미사키는 그 집의 강아지를 만지고 있다. 정말 어리둥절한 연출이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에필로그. 누가봐도 당연히 가후쿠의 차라고 생각할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윤후씨의 집에 있던 강아지라고 생각할 강아지를 차에 태우고 시간의 흐름이 전혀 없음에도 (아내의 사망 이후에는 2년 뒤라는 자막을 친히 달아주었던 것에 비하면 그것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녀는 한국으로 와있고 코로나 시대를 상징하듯 마스크를 쓰고 한국말을 할 줄 아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건 어떻게 해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쇼트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의 그의 전작 아사코에서 보여주었던 무너져내려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근심의 연장으로 읽힌다. 글과 대사와 연기와 아내와 젊은 배우의 존재와 그리고 알지 못했던 이야기의 뒷편에 이르기가지 모든 것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연출되었다. 이런 정교한 연출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나도 많은 평론가들이 분석을 잘 해놓았더라. 그런데 문제는 이런 쇼트들의 균열. 유일한 추리는 가후쿠가 내켜하지 않던 운전수의 자리를 내어준다는거에서 비롯되는데. 그녀의 위치는 마치 신의 자리가 아닐까? 하는거. 굳이 신을 등장시키기 어렵다면 작가의 위치.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작품속 인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미사키가 직접 작품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구원하는 이야기일까? 그러니깐 애당초 코로나 시대에 한국에서 살고 있던 한 한국작가가 자신의 소설 속 이야기를 한 것인가? 라는 상상. 평범한 여고생이 좋아하는 남학생의 빈집에 몰래 들어가는 사연에서 여고생이 침입자의 왼쪽눈을 찔러 죽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가후쿠 역시 녹내장으로 왼쪽눈이 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다. 그러니깐 이 극에서 침입자는 젊은 배우가 아니라 가후쿠 그 자신이다. 이렇게 극에서 가후쿠를 침입자의 위치로 옮겨놓고 나면 결국 극의 중심에는 미사키가 남게 된다. 사실 영화의 90%는 너무나도 감동적일 정도로 잘 만들어졌는데 몇몇 설명이 잘 되지 않는 이상한 쇼트들이 있어 한번 더 영화를 보아야 할 것 같다. 감독이 정답을 다 이야기해주었는데 내가 발견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한게 무얼까.
만춘, 오즈 야스지로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 – 늦은 봄-을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만춘에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씨퀀스가 너무 많아서 위의 씨퀀스는 영화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 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어서 남겨놓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raff의 cavatina를 들을 수 있는 시퀀스이기도 한다. 쇼트 1에서 핫토리는 노리코에게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자고 제안한다. 쇼트 2에서 노리코는 자신을 위해 티켓을 산거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핫토리는 곧 결혼할 여자가 있고 이 자리는 제자인 핫토리를 결혼선물을 위해 아버지가 딸 노리코를 보낸 자리이기 때문이다. 쇼트 3에서 핫토리가 그런거라고 하자 쇼트4에서 노리코는 혼날까봐 그럴 수 없다고 웃으며 말한다. 문제는 갑자기 쇼트 5에서 시작된다. 아무 상관도 없는 연주회장 안내원의 쇼트가 등장한다. 그리고 동시에 raff의 카바티나가 연주된다. 우리는 왜 갑자기 저 안내원이 이 영화에 나오는지 알수 없다. 아마도 핫토리가 노리코가 와주길 기대하면서 안내원에게 표를 맡긴 것 일수도 있고 아닌 것 일수도 있다. 그래서 안내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무심하게 벽에 기대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음악이 흐르는 순간 우리는 저 안내원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핫토리의 심정처럼 보인다. 혹은 핫토리를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노리코의 심정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저 둘 사이의 관계. 교수의 딸과 교수의 제자라는 관계, 사랑했을지도 혹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핫토리가 결혼함으로 핫토리의 삶에 위치했었던 노리코의 자리와 그들의 관계는 사라지게 된다는 체념에 관한 감독의 심정으로 읽는다. 여기서 오즈는 이 둘이 사랑했는지 아니었는지, 어떤 사이였는지 중요한게 아니다. 대신 한 남자가 결혼함으로 변하는 기존의 관계와 새로운 미래의 관계들. 결혼전에 교수님의 딸이기 전에 여자로 만날수 있었던 가능성의 자리는 이제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 그 둘의 관계는 변할 것이다. 그 옆자리. 함께하고 (쇼트 3) 떠나가고 비워지고 쇼트 8 다시 새로운 것들로 채워지는 세월의 관계들, 그 당연한 것에서 삶의 비극을 본다. 그래서 쇼트 9부터 노리코를 따라 움직이던 카메라는 나무 뒤에서 멈춰버린다 (쇼트 11). 거기 노리코가 핫토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거리. 그 거리에서 노리코의 흔적은 곧 사라질 것이고 새로운 다른 사연이 그 거리에 들어설 것이다. 그리고 이제 노리코와 그녀를 둘러싼 삶의 관계들도 달라질 것이다. 물론 이것은 비극이 아니다. 게다가 핫토리와 노리코의 관계는 영화에서 그저 작은 부분일 뿐이다. 또한 오즈의 배우들은 극단적인 비극에 빠지는 법이 없다. 대신 많이 웃을수록 슬프다. 예를 들면 그의 가장 유쾌한 코미디 ‘안녕하세요’를 보면서 나는 가장 많이 눈물을 흘렸었다. 오즈는 항상 인물들이 대화를 할때 인물의 대화의 내용 대신 대화하는 모습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카메라는 180도의 규칙을 깨버리고 두 사람의 대화의 내용대신 그 얼굴과 몸짓, 행위의 움직임에 관심을 갖는다. 사라질 관계들의 순간을 담아내고자 가장 아름다운 장면들을 반복해서 만들어낸다. 사람과 사람이라는 관계의 지도. 그 상실감의 질서. 그 가운데서 변하고, 그리고 변해야 하기 때문에 체념해야 하는 것들. 오즈의 영화들은 그것으로 가득하다. 노리코는 결국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간다. 이 영화의 기본 플롯은 혼자인 아버지를 위해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딸을 시집보내고자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딸을 보내고 텅 비어있는 공간에 홀로 남아 외톨이가 된 아버지 대신해서 아버지가 깎는 사과가 슬픔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아버지의 깊은 심연의 한숨 대신 아버지와 노리코가 함께 살았던 그 집이 불을 밝히지 않는다. 인물들의 슬픔을 대신해서 드러내는 사물들의 체념의 쇼트. 그리고 나와 관계없는 낯선 인물의 어떤 행위의 쇼트들에서 우연히 드러나는 삶의 비극성. 거기서 내리는 결론은 언제나 인간은 혼자라는 쓸쓸함. 예전에 처음 오즈의 영화를 영화제에서 볼때 친구와 함께 ‘뭐야. 영화들이 그냥 죄다 결혼하는 평범한 드라마자나.’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 만일 영화가 동양에서 발명되었고 영화의 이론과 미학적 연구가 아시아에서 발달했다면 – 오즈의 만춘이야말로 영화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베스트1의 위치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레지나 카터 – I’ll be seeing you
이번 주 내내 반쯤 감기몸살 걸린것 처럼 골골거리면서 보냈다. 백신주사도 안맞았는데 말이다. 분명 머리에 열나는 것 같은데 어디 들어갈때 체온 체크하면 정상이다. 내가 문제인건지 기계가 엉터리인건지. 오늘 저녁에도 머리 멍하고 몸이 으슬한 기운에 이마에 손대보니 열나는거 같은데 저녁에 미팅하면서 회의실 들어갈때 체온계 재보니 35도 나오던데. 뭔가 이상. 암튼 이번 주말은 잠이나 푹자고 밀린 음악이나 들으며 뒹굴거려야겠다. 뉴스를 들으니 이번 그래미 재즈부분에 레지나 카터가 후보로 올랐는데 상을 타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생각나서 다시 꺼내본다. 너무 아름다운 I’ll be seeing you. 니나 시몬 마냥 자기만의 템포로 너무나도 아름답게 연주한다…
톤티커피
톤티커피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북촌로 6-8
070-8872-1316
아끼는 카페. 많은 카페들이 에스프레소 베이스로 달달하고 맛있는 음료를 제공하기 위해 에스프레소 원액 자체는 진하고 쓴게 뽑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에스프레소만 먹으면 밸런스가 상실되 있는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에스프레소도 맛있고 그 외 다른 커피음료들도 다 맛있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신기할 뿐이다. 음료에 따라 에스프레소를 따로 뽑는건가? 궁금한데 물어보지는 않았다. 암튼 지금껏 가본 카페 중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어 자주 가는 곳이다.
조우
조우
서울 종로구 경희궁1길 10-1
02-732-1383
오랜기간 서촌을 지키다 광화문으로 이전한지 벌써 몇 년 되었다. 이태리 피에몬테 지역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오랜기간 수련한 쉐프가 제공하는 정통 이태리 가정식이 돋보이는 곳. 처음 먹어보면 뭐 별 것 없어보이는데 오랜기간 찾고 또 찾고 해도 물리지 않는게 이 집의 진정한 가치이다. 단골 손님의 비율이 매우 높은데, 심심치 않게 정제계 문화계 인사들을 마주칠 수 있다.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윤담비 감독의 영화 ‘남매의 여름밤’ 제목을 듣고 문득 허우 샤오시엔의 ‘동동의 여름방학’이 연상되었는데. 전반적 분위기는 달랐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영화는 재개발 아파트에서 밀려난 이혼한 아버지와 남매가 할아버지의 오래된 단독주택으로 집을 옮기며 일어나는 여름 한 때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 남매 또는 여름밤 이라는 단어가 주는 내러티브 보다는 섬세하게 연출한 조명이 더 눈에 들어왔다. 왠지 허우샤오시엔의 오랜 파트너였던 촬영감독 마크 리 핑빙이 연상되는 화면들 말이다. 보통 영화조명을 처음 배울 때 텍스트북에서는 필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최적의 빛조건에서 빛을 빼서 화면을 채우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마크 리 핑빙의 화면들은 반대로 텅빈 공간에 햇살을 더한 듯이 프레임을 구성하는데 덕분에 그가 연출한 영화에서는 낮시간의 나른한 듯한 공기감과 공간감이 잘 느껴진다. ‘남매의 여름밤’에서는 제목처럼 사실 낮의 화면 보다는 밤의 시간들이 훨씬 더 많이 연출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이야기’ 처럼 무겁지 않게 다가오는 까닭은 역시나 공들인 낮의 장면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이 대략 영화가 시작되고 35분에서 36분깨 등장한다. 카메라는 시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 뒤 캄캄한 방에 누워 잠들어있는 할아버지를 먼발치에서 비춘다. 이후 거실에서 잠든 아이와 의자에 앉아있는 아버지를 투쇼트로 잡은 뒤 다시 아버지를 미디엄쇼트로 5-6초간 보여주는데 이때 조명이 아주 살짝 바뀐다. 무언가 생각난다는 표정으로 아버지의 시선이 할아버지를 향하자 잠들어있는 할아버지의 방안으로 슬며시 빛이 들어온다. 카메라는 다시 아버지를 비추고 다시 아이로 이동한다. 그리고나선 다시 아이와 아버지를 투쇼트로 잡아주는데 아버지는 무언가 깨닳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깨운다. 30초 남짓한 시간에 펼쳐지는 이 시퀀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이어지는 3대의 시간을 압축해서 마치 꿈인것 처럼 보여준다. 정말로 놀랍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조현병
미국의 소설가 조안 그린버그는 1967년 한나 그린이라는 필명으로 I Never Promised You a Rose Garden라는 자전적 소설을 발표한다. 소설의 내용은 매릴랜드의 정신병원 Chestnut lodge에서 조현병으로 진단받았던 한 환자의 경험담인데, 주인공은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조현병이 아니라 유사한 증상을 호소하는 신체화장애라고 다시 진단받게 된다. 당시 정신과학에서 뜨거운 화두 중 하나는 바로 조현병이 생물학적인 질환인가 부적절한 양육에 의한 결과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직 생물학적 정신과학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기 이전이고 약물치료에 의한 반응을 살필 기회도 없었으니 진단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소설 속 주치의는 당시 병원의 실제 정신과의사였던 Fromm-Reichmann인데 그녀는 조현병은 부적절한 양육에 의한 결과라는 것을 믿는 신봉자였다. 덕분에 더더욱 올바른 진단이 쉽지 않았으리라. 실제로 Chestnut lodge는 다른 병원들에 비해 항정신병약물 사용이 늦었다고 하고 이 문제는 훗날 초발정신증 분야의 스타 연구자 중 하나인 Thomas McGlashan이 이 병원에서의 수십년간의 치료기록을 검토하며 조현병의 심리치료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일갈하고 나서야 비로소 해결이 된다. 사실 현대 정신의학에서 조현병 진단이라는게 다른 임상의학에 비교하자면 여전히 비과학적인 부분이 많은데 당시의 허술한 진단기준으로 얼마나 잘 진단을 할 수 있었을까 싶긴하다. 암튼 소설은 1960년대 정신과학의 수준과 사회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반대로 요즈음의 정신과학의 풍경을 잘 보여주는 소설도 있다. 바로 뉴욕포스트의 작가인 수잔나 칼할란이 2012년에 발표한 Brain on Fire: My Month of Madness가 바로 그것인데 이 분은 2016년 피렌체에서 열렸던 조현병학회에서 기조연설을 한적도 있다. 난 당시 이런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고 별로 기억에 남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이 소설이 영화로 나오고 나서야 그 때 그 사람이 이 작가란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은 앞에 말한 소설 보다 좀 더 재미난게 바로 NMDA receptor autoimmune encephalititis에 걸려 조현병으로 오진을 받은 환자를 다룬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조현병이 글루타메이트 가설을 조금만 떠올려본다면 이 작품이 주는 스토리의 흥미진진함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현병이란게 과거에는 도파민 관련 질환으로 알려졌지만 오늘날에는 대뇌 피라밋 세포의 NMDA 수용체의 결함이 결과적으로 가바 시스템의 이상을 일으키고 도파민 과잉분비는 단지 그 결과물에 지나지 않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면 신경과 선생님들과 함께 이 질환에 대한 MRS + PET 연구를 함께 해보고 싶은데 이게 될지 모르겠다. 암튼 오늘 낮에 카메라 필름을 몇개 구입하러 충무로에 나갔다가 돌아오는길에 다시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렀다. 서점 코너를 왔다갔다 하다가 정신질환쪽 코너에 보니깐 제법 질환별로 구색을 갖추어간다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유독 조현병 분야의 책은 잘 보이질 않는다. 그나마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책이 존 파워스의 No One Cares About Crazy People: My Family and the Heartbreak of Mental Illness in America를 번역한 ‘내 아들은 조현병입니다’ 정도이다. 아무래도 조현병이 좀 더 드러내기 쉽지 않은 병이라서일까? 여력만 있으면 Fuller Torrey 처럼 조현병 가족들을 위한 조현병 안내서를 한번 써보고 싶은데 할 일도 많고 그런데에 손을 뻗을 시간이 없다. 미국 B급 영화에 나오는 것 처럼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졌으면 한 일년 멈춰놓고 책이나 한권 써봐도 좋을텐데 말이다..
피오 체사레 바롤로 오르나토 2016
백화점 와인코너에 들른 김에 전통주 코너에서 막걸리를 몇 병 구입했다. 그 중의 하나가 잣잎이화주. 얼마전 한 드라마에 이 이화주가 등장한 후 전국적으로 이화주가 날개돗친듯 팔린다 하더라. 물도 없이 꾸덕한 것이 마치 요플레처럼 떠먹는 말걸리였다. 그런데 너무너무 맛있는게 아닌가? 향도 맛도 입안의 식감도 너무나도 훌륭했다. 한 두 스푼 떠먹어보려다 결국 한 병을 다 먹어버렸다. 양이 작아보여도 12도 짜리니 적은 분량은 아닌데 말이다. 그러고나서 저녁 모임에선 다시 와인. 준비한 피오체사레 랑게 샤르도네와 바롤로 오르나토 조합은 저 유명한 와인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이 자신의 결혼식날 만찬주로 준비했던 조합. 당시 2011 빈티지는 그 해 최고의 바롤로로 꼽히기도 했다. 오늘 마신 2016 빈티지도 제임스서클링 98점 로버트파커 96점을 기록한 좋은 와인이다. 몇일 전 마신 바롤로 보다 싱글빈야드에서 만든 이 바롤로 오르나토가 한 수 위. 그런데 앞전에 막걸리도 마시고 다른 와인도 마시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이걸 또 마시니 맛도 향도 잘 모르겠더라. 역시나 좋은건 처음에 마셔야하는데 나중에 마시게되니 후각과 미각이 쉬이 피로해져서 분간이 잘 안된다. 역시 와인은 하루에 하나만 마셔야하나보다. 와인평론가 로버트파커의 전기를 보면 라피드 로칠드였던가 가물가물한데 암튼 십수년간의 빈티지를 모아놓고 버티컬 테이스팅을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순간을 위해 오랜시간 체력단련을 하고 컨디션을 조절을 한다. 최상의 후각과 미각컨디션일때라만 하나의 맛과 향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라나. 암튼 와인도 몸과 마음이 멀쩡할 때나 제대로 진가를 느낄수 있는거다.
좋아하는 영화 100편
올해의 마지막을 기념하며 좋아하는 영화 베스트 10을 고르려니 쉽지가 않다. 마치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 소피의 선택이 연상된다. 이 작품은 2차대전의 비극을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식들 중 살려둘 아이와 죽게 내버려둘 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골라야하는 주인공의 비극을 다루고 있다. 사람의 선호라는게 좋아하면 좋아할 수록 버리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래서 배스트 10 말고 베스트 100으로 골라보기로. 다만 좋아하는 감독 선호가 너무 뚜렸해서 한 감독의 작품이 우르르 나올 수 있으니 감독당 한 작품만 고르는걸로. 그리고 머리는 잠시 내려놓고 그냥 순수하게 재밌게 본 것 중심으로만 골라봤다. 근데 즉흥적으로 적은거라 시간되면 또 바뀔듯.
장비고, 라탈랑트 (1934)
로베르토 로셀리니, 스트롬볼리 (1950)
자크 타티, 윌로씨의 휴가 (1953)
엘리아 카잔, 에덴의 동쪽 (1955)
존 포드, 수색자 (1956)
로제 바딤,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 (1956)
페데리코 펠리니, 카비리아의 밤 (1957)
고바야시 마사키, 검은강 (1957)
루이 말,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1958)
오시마 나기사, 청춘잔혹이야기 (1960)
프랑수아 트뤼포, 쥴앤짐 (1962)
스탠리 큐브릭, 로리타 (1962)
오즈 야스지로, 꽁치의 맛 (1962)
로만 폴란스키, 물속의 칼 (1962)
잉마르 베리만, 침묵 (1963)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붉은사막 (1964)
데시가하라 히로시, 모래의 여자 (1964)
클오드 를르슈, 남과여 (1966)
이만희, 외출 (1968)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솔라리스 (1968)
세르지오 레오네, 옛날옛적 서부에서 (1968)
죤 술레진저, 미드나잇 카우보이 (1969)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돼지우리 (1969)
베르너 헤어초그, 아귀레 신의 분노 (1972)
카츠미 이시카와, 이즈의 무희 (1974)
로베르 브레송, 호수의 란슬롯 (1974)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974)
따비아니 형제, 파드레 파드로네 (1977)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 (1979)
이미무라 쇼헤이, 복수는 나의 것 (1979)
폴커 슐렌도르프, 양철북 (1979)
마틴 스콜세지, 성난황소 (1980)
우디 알렌,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1980)
빔 벤더스, 파리 텍사스 (1984)
천 카이거, 황토지 (1984)
허우 샤오시엔, 펑쿠이에서 온 소년 (1983)
브라이언 드 팔마, 스카페이스 (1983)
임권택, 안개마을 (1983)
장 뤽 고다르, 카르멘이라는 이름 (1983)
레오 카락스, 소년 소녀를 만나다 (1984)
라세 할스트롬, 개 같은 내 인생 (1985)
끌로드 베리, 마농의 샘 (1986)
마르코 벨로치오, 육체의 악마 (1986)
모리스 피알라, 사탄의 태양아래 (1987)
빌 어거스트, 정복자 펠레 (1987)
아녜스 바르다, 아무도 모르게 (1987)
배창호, 기쁜 우리 젊은날 (1987)
왕가위, 열혈남아 (1988)
테오 앙겔로풀로스, 안개속의 풍경 (1988)
쥬세페 토르나토레, 시네마천국 (1988)
끌로드 밀러, 귀여운 여도적 (1988)
에릭 로샹, 동정없는 세상 (1989)
데릭 저먼, 가든 (1990)
가브리엘 살바토레, 지중해 (1991)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1991)
에릭 로메, 겨울이야기 (1992)
클로드 소테, 금지된 사랑 (1992)
비탈리 카네프스키, 눈오는날의 왈츠 (1992)
난니 모레띠, 나의 즐거운 일기 (1993)
아키 카우리스마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모세를 만나다 (1994)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올리브 나무 사이로 (1994)
즈카모토 신야, 동경의 주먹 (1995)
유진위, 서유기2 선기리연 (1995)
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 (1995)
에밀 쿠스크리챠, 언더그라운드 (1995)
트란 안 홍, 시클로 (1995)
이와이 순지, 러브레터 (1995)
프레데릭 토르 프레데릭슨, 콜드 피버 (1995)
김기덕, 악어 (1996)
모리타 요시미츠, 하루 (1996)
마이클 레드포드, 일 포스티노 (1996)
가와세 나오미, 수자쿠 (1997)
이창동, 초록물고기 (1997)
기타노 다케시, 하나비 (1998)
허진호,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오가와 신스케, 일본국 후루야시키 마을 (1998)
에릭 종카,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 (1998)
올리비에 아싸야스, 8월말 9월초 (1998)
켄 로치, 레이닝 스톤 (1999)
폴 토마스 앤더슨, 매그놀리아 (2000)
에드워드 양, 하나 그리고 둘 (2000)
미야자키 하야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1)
거스 반 산트, 게리 (2002)
마이클 윈터바텀, 인 디스 월드 (2002)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녀에게 (2002)
누리 빌게 제일란, 우작 (2002)
라스 폰 트리에, 도그빌 (2003)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열대병 (2004)
다르덴 형제, 더 차일드 (2005)
지아장커, 스틸라이프 (2006)
임상수, 오래된 정원 (2006)
브루노 뒤몽, 하데비치 (2009)
베넷 밀러, 머니볼 (2011)
스파이크 존즈, 그녀 (2013)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버드맨 (2014)
홍상수, 밤의 해변에서 혼자 (2017)
구로자와 기요시, 산책하는 침략자 (2017)
하마구치 류스케, 아사코 (2018)
제임스 그레이, 애드 아스트라 (2019)
비킹구르 올라프손 – 바흐의 Concerto in D Minor
늦잠자고 일어나 창문 열어 놓고 새소리랑 같이 들으니 좋다. 올라프손은 바흐 연주자로 최근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데 전통적 의미의 바흐와는 참 다르게 연주한다. 코코넛 밀크 같은 연주. 그런데도 역시나 좋다.
다테야마, 도야마
슈베르트 – 현악사중주 C Major, 2nd movement
슈베르트가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즈음 작곡한 현악 5중주. 홍상수 감독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쓰여서 더욱 유명해졌다. 많은 이들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장면들이 이리저리 변주되어 보여지는 걸 보고는 일상의 반복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그건 좀 핀트가 나간 이야기. 마치 누군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 때 그 의도와 마음은 모른채 그저 뱉어진 단어들을 늘어놓고 인생의 비밀을 풀어보려는 헛된 시도 같다고나할까. 무언가 있어 보이나 결코 잡을 수 없는 것. 하지만 그가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건 그런게 아니다. 영화에는 삶의 모든 순간 어떠한 순간에도 당신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그의 간절한 다짐 그러나 결국엔 놓을 수 밖에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겨있다. 죽음을 앞둔 슈베르트의 마음을 그 역시 느꼈으리라 생각.
Fotoimpex Berlin
1992년 설립된 Fotoimpex는 아날로그 사진을 위한 재료를 취급하는 소매점으로 오늘날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아날로그 사진용품점 중 하나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동유럽 경제가 몰락하기 시작했는데 이 즈음 회사는 Foma, Fotokemika 같은 동유럽 브랜드를 세계에 소개하고 반대로 미국 사진제품들을 수입하며 독일내에서 입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2001년부터는 ADOX 브랜드를 구축하고 2006년 Agfa, Forte 등에서 기계를 구입하며 생산활동도 이어나가고 있다. 오늘날 Fotoimpexsms 4000개 이상의 제품을 취급하는 유럽 최고의 아날로그 사진용품 공급업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베를린 중심부의 알렉산더 광장에서 Weinmeisterstraße 역 쪽으로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금새 도착할 수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베를린에 있다면 한번쯤 들러볼만 하다.
필름으로 사진찍기에 관하여
처음 사진을 배울 때는 당연히 사진은 필름으로 찍는 것이었다. 다 떨어진 조악한 일본 번역판 흑백사진 서적을 보고 암실에서 또는 그럴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암백을 구비하고 현상약품을 사다가 현상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안셀 아담스의 존시스템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했고 원하는 주제를 부각시키는 노출을 위하여 스팟측광을 어떻게 해야할지 계산하곤 했다. 많은 이들이 전자동 SLR 카메라가 아닌 니콘 FM2 바디 또는 미놀타 X300 을 중고로 구입하여 사용하곤 했다. 올림푸스 PEN EE 같은 것은 조금 덜 진지한 카메라로 여겨졌고 라이카 같은 것은 카메라 샵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카메라였다. 그러다가 200만화소 짜리 디지털 카메라가 대중화 되면서 너도나도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서로간에 디지털이 좋느니 아나로그가 좋느니 따위의 논쟁도 곧잘 벌어지곤 했었다. 하지만 다 지난 이야기다. 사진의 헤게모니를 이제는 디지털이 완전히 장악했다. 프로 사진작가들도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에 맞추기 위하여 다들 디지털을 사용한다. 오히려 요즈음에는 디지털 사진기들 마저 아이폰이나 갤럭시 같은 핸드폰에 달려있는 카메라에 주도권을 점차 넘겨주는것 같다. 요즈음 가장 많이 대중화되어있는 사진 사이트인 flickr 이나 500px 같은 사이트에서도 가장 많이 포스팅 되는 기종은 전문 카메라가 아니라 핸드폰 카메라이니 말이다. 이 자리를 빌어 필름이 더 좋느니 아직 디지털이 이건 부족하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할 생각은 없다. 그냥 다른 것이다. 영화를 예로들자면 21세기가 한참 지난 지금도 여전히 CGV 같은 대형영화체인이 있고 또 한쪽 구석에는 시네마테크서울 같은 전문상영관이 있으며 박스오피스와 연예가중계 같은 대중체널이 있는 반면 칸느영화제와 카이에 뒤 시네마 같은 잡지가 공존하는 것 처럼 말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카메라는 너무너무 성능이 좋아서 뭐라 흠을 잡을데가 없다. 흑백사진 조차도 전문 후보정 프로그램을 통해서 정교한 필터 작업과 리터칭을 하게 된다면 (많은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제법 필름과 유사한 톤을 보여준다.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는 초대형 인화에서 보여지는 필름의 그레인의 느낌이 어쩌고 따위의 말은 이제는 별 의미가 없어진 것 같다. 필름은 이제는 소수의 진지한 아마추어들과 애호가들 그리고 옛 향수를 아직도 그리워하는 사람들 또는 몇몇 고집스런 프로페셔널들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여겨진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더 필름다운 사진일까를 고민해보게 된다. 콘트라스트가 도드라지는? 선예도가 뛰어난? 계조가 좋은? 입자가 도들아지는? 사실 디지털의 경우도 워낙 후보정이 발달하다보니 디지털 사진도 적어도 모니터 상에서는 무엇이 필름이고 무엇이 디지털인지 알아보기 쉽지 않은 정도로까지 발달해있다. 필름을 스캔해서 모니터상에서 보는 것으로는 사실 필름의 장점을 십분 발휘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많은 현상소들이 디지털스캔 디지털인화를 하다보니 스캔본도 그리고 인화본도 예전의 그 맛을 느끼기 쉽지가 않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손수 현상/인화를 하거나 또는 전문 작가들의 전시회장에서나 제대로 된 프린트를 볼 수 있는 형편이다. 더구나 간간히 전시회를 곧잘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몰래 한 두장 정도는 디지털프린트를 했는데 아무도 구분 못하더라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는걸 보면 아나로그와 필름의 차이란건 우리들의 관념속에서나 존재하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게 된다. 분명 차이는 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라인드로 구분하지 못하고 오로지 나란히 펼쳐놓고 누군가 말을 해줄때야 아 그렇구나 하고 차이를 인식하게 된다면 그런 차이가 얼마나 대단한걸까? 그러니깐 왜 좋냐에 대한 질문에 논리적 답변을 하기가 자못 궁색해진다. 그냥 좋은 것이다. 좋으니깐 모든 것이 다 이유를 가지게 되고 당위를 가지게 된다. 렌즈의 성능을 운운하는 사람은 많이 보았어도 현상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다들 별 말이 없다. 나는 현상의 정도와 필름의 종류가 사진의 색, 톤, 계조에 미치는 영향이 80이라면 렌즈는 고작 20정도라고 생각을 한다. 디지털 바디에 올드렌즈를 가지고 사진을 찍으나 현대식 비구면렌즈를 가지고 사진을 찍으나 그 차이는 극히 미세해진다. CCD나 CMOS의 특성아래 렌즈의 차이란건 미미해져버리고 만다. 그런 측면에서는 필름현상이야말로 내가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그 결과가 천양지차로 달라지니 훨씬 더 재미난 일이 아닌가?
예전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 증감현상을 점차 선호하게 되었다. 증감이란건 그냥 노출이 부족한 시간대에 임시방편으로 하는 수단 같은 것이었다. 400짜리를 증감하는게 입자가 더 좋을까? 3200 짜리를 감광하는게 더 좋을까? 따위의 생각은 말 그대로 증감시 도드라지는 특성을 어떻게 죽여볼까? 하는 고민같은 것이었다. 사진은 delta 100이나 TMX 같은 입자가 고운 필름으로 찍는게 제맛이었고 가장 깔끔하게 보여졌다. Tri-X 나 HP5 같은 필름으로 사진을 즐겨하는 것은 그냥 나 필름입니다를 강조하는 걸로만 여겨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어디에서나 콘트라스트도 빼어나고 샤프하고 깔끔한 영상을 보다보니 이제서야 필름의 톤과 그레인이 주는 매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증감의 시작은 이런 이유는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레인지파이더 카메라로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f/1.4의 조리개 탭을 순식간에 맞추는건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브레송처럼 구도 정해놓고 한 장소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지 않는한 말이다. 거리사진에서 빠른 순간 포착을 위해서 여러 작가들은 개방이 아닌 심도가 깊은 조리개를 사용했고 또 짧은 셔터타임을 위하여 증감을 했던 것이다. 유명한 f/16의 법칙을 적용해본다면 한낮의 일광하에서 ASA 100짜리 필름이 조리개 f/11 정도에 셔터타임이 1/125라면 ASA 400 필름은 1/500 정도에 대응할 수 있으니 흐린날이나 해질 무렵을 예상해본다면 2스톱 정도는 푸쉬를 해야지만 사람들의 움직임에 흐려짐이 없는 셔터타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은 둘째치고라도 미적으로 푸쉬현상을 한 필름의 그레인은 무척 아름답다. 도들도들하게 보이는 필름의 미세한 입자들을 보다보면 세상이 점으로 환원된 것만 같은 착각이 생겨난다. 세상을 바라보는 근원 시각이 컬러와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꼭 푸쉬현상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입자를 도드라지게 현상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대형확대에서는 어차피 드러나기 때문에 적절히 그 정도를 조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 사진은 사진작가 로비 맥킨토쉬가 후지 네오펜400 필름으로 촬영한 작품이다. 그레인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해외 흑백사진 관련 포럼에서 사람들의 사용기를 읽어보면 대부분 그레인을 두드러지게 하는 것을 선호하는 부류 그리고 완전히 그레인을 조밀하게 해서 매끈한 흑백을 선호하는 부류로 나뉘는걸 보곤 한다. 하지만 디지털이 성행하는 요즈음에서는 도리어 그레인이 도드라지는 쪽이 더 필름다운 맛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알함브라 궁전, 그라나다
키스 자렛 – It never entered my mind
한 십수 년 전, 그러니깐 911 테러가 일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뉴욕으로 보름쯤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911 광장의 새 건물이 완공되지 않았던걸 보면 사건이 터지고 그리 오래되진 않았던 때 같다. 몇군데 일부러 돌아다닌걸 제외하면 거기서도 별로 열심히 관광을 다니진 않았고 맨날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빈둥빈둥 했었다. 게스트하우스가 컬럼버스서클 근처였던터라 늦잠 자고 일어나서 근처 링컨센터에 있는 시네마테크에서 오후영화를 보고 밤에는 타임아웃뉴욕에 나온 당일 라이브하는 재즈바에 찾아가서 밤새 술을 마시고 공연을 보다 새벽에 숙소에 돌아오곤 했다. 그런데 인기 있는 재즈라이브 공연은 미리 전화로 예약을 해야했고 나처럼 당일 예약을 하는 관광객은 인기공연 예약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찾아가게 되는 곳은 대부분 변두리 건물 지하 구석 초라하게 좁다랗게 만들어진 곳들이었다. 암튼 그날도 늦게 끝난 영화를 마무리하고 허기를 달랜 후 마음먹은 재즈바로 들어갔다. 라이브를 방금 막 시작하고 있었는데 나를 포함해 총 3명이 거기 모인 사람의 전부였다. 내가 들어가니 모두들 날 바라보는데 왠지 당황스러웠다. 너무 초라해 보이기도 하고 약간 부끄럽기도 하고. 순간 들어가지 말까 하다 그냥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때 그 곳에서 연주되고 있던 곡은 내가 좋아하는 It never entered my mind 였다. 떠나간 연인을 추억하며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냐며 자조하는 곡. 1940년대 로저스와 하트의 뮤지컬인 하이어하이어에 나왔던 곡인데 수많은 재즈연주자들이 리메이크를 한 명곡이다. 나 같은 경우는 마일즈 데이비스나 쳇베이커, 줄리 런던 같은 스타일의 연주만 주로 들었는데 당시 거기서 연주되던 곡은 키스 자렛의 편곡 같은 곡이었다. 중간부터 듣은데다 워낙에 딜레탕트적으로 연주를 하고 있던지라 무슨 곡인가 하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 이곡이 이곡이었구나’ 하고 깨닳았을 때의 짜릿함. 지적이고 예민한 스타일의 연주. 내 스타일은 분명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당시 뉴욕에서 들렀던 여러 재즈바에서의 많은 곡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게 뭐 연주가 좋아서였던건지 아니면 그 몇명 없고 비좁고 담배연기가 가득찼던 그 곳의 분위기가 좋아서였던건지 모르겠다. 한 이십년전 우리나라에 처음 재즈바 열풍이 몰아닥칠 때 여기저기 라이브 공연을 하는 재즈바가 우후죽순 생기고 라이브연주도 꽤나 많았던게 생각난다. 요즘은 다들 어디로 간건지 모르겠다. 이런걸 주변 어디에서 다시 들어볼 수 있을까..
Angelo Badalamenti – Cousins (영화 밀애 ost)
오랜만에 영화음악. 안젤로 발라멘티의 러브테마. 조엘 슈마허 감독의 1989년작 밀애에 나왔던 곡이다. 원제는 Cousins 사촌들인데 국내에는 밀애로 수입이 되었다. 요즈음의 영화들을 보면 번역하기 애매한 경우 그냥 원제를 그대로 쓰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80-90년대에는 확실히 원제와 아무 상관없이 제목을 짓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안젤로 발라멘티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 블루벨벳, 광란의 사랑, 트윈픽스에서 음악을 맡으며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재밌는건 블루벨벳에 이제 막 출연했던 이자벨라 로셀리니가 바로 이 영화 밀애에서도 여주인공으로 나온다는 것. 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딸로 우리에게 더 유명한 배우. 이 러브테마는 나중에 우리나라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테마곡에 표절시비가 있던 원곡으로 더 유명하다. 암튼 좋은 음악은 다시 들어도 좋다.
칙 코리아 – Spain played by Maike
얼마전 타개한 칙 코리아의 대표곡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고 들어가게 될 곡이 아마도 스페인이 아닐까? 미시시피의 지류와도 같은 거대한 마일스 데이비스에게서 독립해서 리턴 투 포에버 밴드를 만들고 Light As A Feather 라는 제목의 앨범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수록되어 있던 곡. 아랑훼즈 협주곡의 테마를 따와서 그 자장에서 전혀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 만의 개성이 오롯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곡이다. 사실은 지난 주말 비가 오는 통에 외출을 못했는데 (뭐 주말 내내 온 것도 아니지만 계속 게으르게 방바닥을 구르다가 마음을 먹었던 바로 그 순간 비가 왔었다) 봄이 더 가기 전에 이번 주는 인왕산을 가보려했는데 또 비가 내린다. 지난 주 보다 더 많이 더 오래. 암튼 비오는 날 더 듣기 좋은 곡이긴 하다.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
항정신병약물 등가용량
“The defined daily dose DDD is the assumed average maintenance dose per day for a drug used for its mainindication in adults.” 4 DDDs are produced by the WHOCollaborative Center for Drug Statistics Methodologyfor all drugs listed in the Anatomical Therapeutic Chemical (ATC) classification system (http://www.whocc.no/). The following principles are important: thereference point for DDDs is a 70-kg adult, and they arebased on the main indication of a drug, which in thecase of antipsychotics is “psychosis.”
Olanzapine 1mg Equivalents Based on DDDs, the Minimum Effective Dose Method, the Classical Mean Dose Method, and an International Consensus
DDD method | Leucht S et al. | Gardner DM et al. | |
Amisulpride | 40 | 38.33 | 34.48 |
Aripiprazole | 1.5 | 1.41 | 1.49 |
Chlorpromazine | 30 | 38.88 | 30.3 |
Clozapine | 30 | 30.62 | 20 |
Haloperidol | 0.8 | 0.74 | 0.5 |
Lurasidone | 6 | ||
Olanzapine | 1 | 1 | 1 |
Paliperidone | 0.6 | 0.45 | |
Perphenazine | 3 | 1.49 | |
Quetiapine | 40 | 32.27 | 37.04 |
Risperidone | 0.5 | 0.38 | 0.3 |
Sulpiride | 80 | 40 | |
Ziprasidone | 8 | 7.92 | 8 |
Zotepine | 20 | 13.24 | 14.93 |
- Leucht S, Samara M, Heres S, DAvis JM. Dose equivalents for antipsychotic drugs: the DDD method. Schizophr Bull. 2016;42.suppl_1: S90-S94.
- Leucht S, Samara M, Heres S, et al. Dose equivalents for second-generation antipsychotic drugs: the classical mean dose method. Schizophr Bull. 2015;41:1397–1402.
- Gardner DM, Murphy AL, O’Donnell H, Centorrino F, Baldessarini RJ. International consensus study of antipsychotic dosing. Am J Psychiatry. 2010;167:686–693.
근로능력평가 기준
3개월 이상 충분한 치료를 시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증상이 지속되는 경우에만 진단서 발급이 가능하다. 단, 자해 및 타해 등의 위험으로 시급한 입원치료가 필요한 경우 또는 선천적 지적능력 저하 등 질병이 고착되어 상태의 호전 및 악화의 변화 가능성이 없는 경우는 예외로 한다.
유의사항: 1개의 질병만을 평가한다
배제질환: 성인의 인격 및 행동장애(F60-F69)
평가방법:
- 자해 및 타해 등의 위험으로 인하여 시급한 입원치료 등이 필요한 경우 또는 선천성 지적능력 저하 등 질병이 고착되어 상태의 호전 및 악화의 변화 가능성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가전에 정신과적으로 3개월 이상 충분한 치료를 시행하였음에도 증상이 지속되는 경우에 한하여 평가를 시행한다.
- 약물치료 정도, 외래 및 입원치료 경과, 진단명의 특성, 질환의 중등도에 따른 일상생활의 제한정도 등을 고려하여 평가한다.
- 알코올을 포함한 중독장애의 경우 증상의 심각성에 관계없이 1단계로만 평가한다. 다만 중독장애의 후유증으로 섬망, 환시, 환청, 환촉 등 정신병적 증상이나 기억력 장애 등을 동반하는 경우에는 중등도를 고려하여 2단계 이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
1단계 | 정신질환으로 인한 사회적, 직업적 어려움은 없으나 증상의 재발을 막기 위해 유지 치료와 안정가료가 필요한 경우 |
2단계 | 정신질환으로 인해 사회적, 직업적 어려움이 간헐적으로 나타나고 있고 유지 치료와 안정가료가 필요한 경우 |
3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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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단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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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등급 판정기준
지적장애 판정기준
(1) 장애의 원인 질환 등에 관하여 충분히 치료하여 장애가 고착되었을 때에 진단하며, 그 기준시기는 원인 질환 또는 부상 등의 발생후 또는 수술후 6개월 이상 지속적으로 치료한 후로 한다.
(2) 발달단계에 있는 소아청소년은 만 6세 미만에서 장애판정을 받은 경우 만 6세 이상~만 12세 미만에서 재판정을 실시하여야 한다. – 만 6세 이상~만 12세 미만 기간에 최초 장애판정 또는 재판정을 받은 경우 향후 장애상태의 변화가 예상되는 경우에는 만 12세 이상~만 18세 미만 사이에 재판정을 받아야 한다.
(3) 수술 또는 치료 등 의료적 조치로 기능이 회복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장애판정을 처치 후로 유보하여야 한다. 다만, 1년 이내에 국내 여건 또는 장애인의 건강상태 등으로 인하여 수술 등을 하지 못하는 경우는 예외로 하되, 필요한 시기를 지정하여 재판정을 받도록 하여야 한다.
(4) 향후 장애정도의 변화가 예상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재판정을 받도록 하여야 한다. 이 경우 재판정의 시기는 최초의 진단일로부터 2년 이상 경과한 후로 한다. 2년 이내에 장애상태의 변화가 예상될 때에는 장애의 진단을 유보하여야 한다.
(5) 재판정이 필요한 경우에 장애진단을 하는 전문의는 장애진단서에 그 시기와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여야 한다.
지적장애 판정절차
(1) 지적장애는 웩슬러 지능검사 등 개인용 지능검사를 실시하여 얻은 지능지수(IQ)와 사회성숙도 검사 등에 따라 판정하는데 지능지수는 언어성 지능지수와 동작성 지능지수를 종합한 전체 검사 지능지수를 말한다. 전체 지능지수가 34 이하인지 판별이 어려운 경우 검사자가 보정법에 의하여 추정치를 산출하거나, C-GAS를 추가 시행하고, 임상적 판단에 의하여 34 이하(정신연령 3세 이하) 인지를 판단하여 그 근거를 기술한다. 사회성숙도 검사상, 사회성숙지수가 지능지수와 서로 다른 급으로 산출된 경우, 더 높은 점수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2) 만 2세 이상부터 장애판정을 하며, 유아가 너무 어려서 상기의 표준화된 검사가 불가능할 경우 바인랜드(Vineland) 사회성숙도검사, 바인랜드 적응행동검사, 또는 발달검사를 시행하여 산출된 적응지수나 발달지수를 지능지수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판정한다.
(3) 뇌 손상, 뇌 질환 등 여러 가지 원인에 의하여 성인이 된 후 지능저하가 온 경우에도 상기 기준에 근거하여 지적장애에 준한 판정을 할 수 있다. 단, 노인성 치매는 제외한다.
장애등급
1급: 지능지수와 사회성숙지수가 34 이하인 사람으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의 적응이 현저하게 곤란하여 일생동안 타인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
2급: 지능지수와 사회성숙지수가 35 이상 49 이하인 사람으로 일상생활의 단순한 행동을 훈련시킬 수 있고, 어느 정도의 감독과 도움을 받으면 복잡하지 아니하고 특수기술을 요하지 아니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람
3급: 지능지수와 사회성숙지수가 50 이상 70 이하인 사람으로 교육을 통한 사회적․직업적 재활이 가능한 사람
정신장애 판정기준
(1) 1년 이상의 성실하고, 지속적인 치료 후에 호전의 기미가 거의 없을 정도로 장애가 고착되었을 때에 장애를 판정한다.
(2) 장애인등록 이후에 매 2년마다 장애등급을 재판정한다. 다만, 2회에 걸친 재판정에서 최초 판정시와 동급판정(최초판정을 합하여 연속 3회에 걸쳐 동급판정)을 받은 경우에는 이후의 의무적인 재판정에서 제외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장애 판정의의 판단에 의하여 장애상태의 변화가 예상되는 때에는 장애진단서에 재판정 시기와 구체적 필요성을 명시하여 최종 판정일로부터 2년 이후의 일정한 시기를 정하여 재판정을 받도록 할 수 있다.
장애등급 판정
(1) 현재 치료중인 상태를 확인
현재 약물복용 등 치료중인 상태에서 정신장애 판정을 하여야 한다.
(2) 정신질환의 진단명 및 최초 진단시기에 대한 확인
우리 나라에서 공식적인 정신질환 분류체계로 사용하고 있는 국제질병분류표 ICD-10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10th Version)의 진단지침에 따라 ICD-10의 F20 정신분열병, F25 분열형정동장애, F31 양극성 정동장애 및 F33 반복성 우울장애로 진단된 경우에 한하여 정신장애 판정을 하여야 한다.
(3) 정신질환의 상태(impairment)의 확인
- 적절한 음식섭취: 영양의 균형을 생각하고, 스스로 준비해서 먹는 음식섭취의 판단 등에 관한 능력장애의 유무를 판단한다.
- 대소변관리, 세면, 목욕, 청소 등의 청결 유지: 세면, 세족, 배설후의 위생, 목욕 등 신체위생의 유지, 청소 등의 청결의 유지에 관한 판단 등에 관한 능력장애의 유무를 판단한다. 이들에 대해, 의지의 발동성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적절하게 행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 도움이 필요한지 여부를 판단한다.
- 적절한 대화기술 및 협조적인 대인관계: 타인의 말을 알아듣고, 자신의 의사를 상대에게 전하는 의사소통의 능력, 타인과 적절하게 사귀는 능력에 주목한다.
- 규칙적인 통원․약물 복용: 자발적․규칙적으로 통원 및 복약을 하고, 병상이나 부작용 등에 관하여 주치의에게 잘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가, 도움이 필요한가 여부를 판단한다.
- 소지품 및 금전관리나 적절한 구매행위: 금전을 독립적으로 적절하게 관리하고, 자발적으로 적절하게 물건을 사는 것이 가능한가, 도움이 필요한가 여부를 판단한다(금전의 인지, 물건사기의 의욕, 물건 사기에 동반되는 대인관계 처리능력에 주목한다).
- 대중교통이나 일반공공시설의 이용: 각종의 신청 등 사회적 수속을 행하거나, 은행이나 보건소 등의 공공시설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여부를 판단한다.
장애등급기준
1급1호: 정신분열병으로서 망상, 환청, 사고장애, 기괴한 행동 등의 양성증상 또는 사회적 위축과 같은 음성증상이 심하고 현저한 인격변화가 있으며, 기능 및 능력장애로 인하여 능력장애 판정기준의 6항목 중 3항목 이상에서 전적인 도움이 필요하며, GAF척도 점수가 40이하인 사람(정신병을 진단받은지 1년 이상 경과한 사람에 한한다. 이하 같다)
2급1호: 정신분열병으로 망상, 환청, 사고장애, 기괴한 행동 등의 양성증상 및 사회적 위축 등의 음성증상이 있고 중등도의 인격변화가 있으며, 기능 및 능력장애로 인하여 능력장애 판정기준의 6항목 중 3항목 이상에서 많은 도움이 필요하며, GAF척도 점수가 41점 이상 50점 이하인 사람
3급1호: 정신분열병으로 망상, 환청, 사고장애, 기괴한 행동 등의 양성증상이 있으나 인격변화나 퇴행은 심하지 아니한 경우로서, 기능 및 능력장애로 인하여 능력장애 판정기준의 6항목 중 3항목 이상에서 간헐적인 도움이 필요하며, GAF척도 점수가 51점 이상 60점 이하인 사람
대리처방
(경우1)
환자의 의식이 없는 경우
(경우2)
① 환자의 거동이 현저히 곤란*하고,
② 같은 질환에 대하여 계속 진료를 받아오면서,
③ 오랜 기간 같은 처방이 이루어지는 경우
*사회적 거동이 현저히 곤란한 자(교정시설 수용, 군복무, 정신질환 등의 사유로 의료기관 방문이 곤란하거나 내원을 거부하는 자) 포함
※ 다만, 처방 의료인의 의학적 판단에 따라 안전성을 인정하는 경우만 대리처방 가능하며, 의료인은 판단에 따라 대리처방을 거절할 수 있음
Herb Ellis & Remo Palmier – Stardust
허브 엘리스와 레모 팔미에의 앨범 windflower에 수록된 stardust. 이 곡을 들으면 처음 이 곡을 알게해준 스테판 그라펠리의 강렬한 연주가 잊히질 않지만 이 둘의 연주는 마치 그 옆에 다소곳이 피어난 봄 꽃 또는 봄 바람 같은 느낌으로 잔잔하게 마음을 적신다.
Stefan Nilsson – Towards the new world (영화 정복자 펠레 ost)
클리어파일을 몇 개 구입하러 서점에 딸린 문구점에 들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우연히 가판대에 놓인 엘레나 페란테의 신작 어른들의 거짓된 삶을 발견하고 냉큼 구입했다. 몇년 전 그 쪽 동네로 여름휴가를 간적이 있다. 그 때 문득 여행하는 동네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보며 여행하고 싶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서 그녀의 나폴리 4부작을 구입했었고 그런 계기로 그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나폴리를 배경으로 작품을 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녀의 작품들이 꽤 인기를 끌었다. 나폴리 4부작에 이어 나쁜사랑 3부작이라는 이름으로도 소설들이 국내에 다 출판되었다. 여기에는 한길사의 아픔다운 책 표지들도 한 몫 한 것 같다. 소설들은 분명 어둡고 침침한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책표지는 반대로 햇살 가득한 아말피 감성으로 디자인 되어있다. 묘한 아이러니. 그러고보니 빌 어거스트 감독의 정복자 펠레 또한 떠오른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잔인한 세상에서 연약한 영혼이 유리벽을 깨고 나오는 이야기. 영화속에는 잔인한 이야기들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그려져있다. 마치 우리들이 어렸을때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 뿌연 잿빛으로 미화되어 어렴풋이 남는 것 처럼 원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검정색과 잿빛과 푸루름 그리고 노을 빛 같은 눈부심들이 뒤섞여 있는 것들. 그렇게 따지자면 한길사의 아름다운 책표지들도 다 이유가 있는걸까? 아래 동영상은 영화의 중간 어디쯤. 주인공이 언덕에 앉아 바다를 떠다니는 배들을 바라보는 가슴 미어지는 장면.
동경여관, 오즈 야스지로
오즈 야스지로의 1935년작 동경여관.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이기도 하다. 두 아들을 데리고 일자리를 찾아 전전하는 주인공 키하치가 우연히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린 딸을 데리고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모녀를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 잠시나마 행복을 누릴 찰나 찾아온 비극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영오즈의 이전 무성영화에서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만은 시각적 요소와는 별개로 음악이 내내 사용된다. 영화에서는 기이한 장면이 몇번 등장하는데 그럴 때면 음악이 삭제된다. 그리고 이 때 우린 시공간이 달라진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마치 영화의 매트릭스 속에 위치해있다가 어느 순간 그자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해있던 세계의 외형을 바깥에서 보게 되는 경험. 그래서 딸 아이의 죽음 이후 갑자기 사라진 여자가 다시 등장할 때 문득 이건 현존하는 실체로서의 그녀가 아니라 폐망한 일본의 원혼이란 생각이 들었다. 1935년이면 만주사변 끝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직전 즈음인데. 그 잘나가던 일본도 속을 들여다보면 황량하기 그지 없다.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맘마로마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암튼 로마나 동경이나 도시의 뒷모습은 닮아있는 듯 하다. 이 영화에서 하나 재미난 점은 여주인공으로 당시의 톱배우였던 오카다 요시코가 나온다는거다. 오즈의 영화에는 2년전 동경의 여자라는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여러모로 다들 아는 하라 세츠코를 닮아있는 여자. 아쉽게도 당시 군국주의 일본에 환멸을 느끼던 그녀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일본 공산당원이었던 남편과 함께 사할린으로 향했는데 우여곡절끝에 남편은 사형에 처해지고 그녀는 10년간의 노동교화형을 받은 후 소련에 남게 된다. 훗날 복권되어 잠시 일본으로 귀국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스크바로 돌아가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녀가 소련으로 가지 않았더라면 이후의 오즈의 작품들에 그녀가 계속 출연했을까 상상만 해본다.
라이카 iiig
개인적으로 바르낙 바디 중에서 두 번째로 사용한 사진기다. 나도 처음에는 RDST 라고 부르는 Red Dial Self Timer를 가진 라이카 IIIf를 사용했었다. 매우 튼튼하고 신뢰감이 가는 멋진 사진기였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아무 탈 없이 잘 사용했음에도 미국식이 아닌 유럽식 셔터 다이얼을 가졌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엄밀히 따져보면 반 스톱의 반 정도 될까 말까 하는 미묘한 차이일 뿐이지만 슬라이드 필름으로 사진을 촬영하다 보면 괜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뭔가 원하는 대로 노출을 제어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IIIg는 바르낙을 사용한다면 놓칠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IIIg를 사용하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M3와 비견될 정도로 부드럽고 정숙한 셔터음이었다. 어느 리포트를 보면 추후 M3에 사용될 부품이 많이 도입되었다고 하던데 아마도 그 때문일 거라 생각된다. 실제로 초기부터 IIIf 까지의 바르낙 바디들은 아무리 관리를 잘하더라도 M 바디 보다 셔터음과 충격이 좀 더 크다. 하지만 이 IIIg 만은 이전에 비해 확연히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다. 더구나 이전 바르낙에 비해서 넓고 시원해진 뷰파인더는 IIIg에서 가장 눈에 띄게 바뀐 부분이다. 뷰파인더는 단순히 커진 것에 그치지 않고 이후의 M3 바디처럼 50밀리 프레임 라인을 보여준다. 사실 이전의 바르낙 바디의 뷰파인더들은 프레임 라인이 없으며 시야가 50mm 보다 조금 더 넓은데 촬영습관이나 안경착용 유무에 따라서 촬영을 한 뒤 필름을 보면 프레임이 실제 뷰파인더로 본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IIIg는 50밀리 프레임이 뷰파인더 안에 나타나기 때문에 무척 편리하다. 더구나 90mm 프레임 라인이 별도로 제공되기 때문에 SGVOO 같은 90mm 외장 뷰파인더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이 좋다. 덕분에 전면에서 보면 양옆으로 레인지 파인더가 위치하고 가운데 뷰파인더와 프레임 라인을 보여주는 프레임이 있으며 이것들을 하우징이 감싸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35mm 프레임 라인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꼭 SBLOO 같은 대형 외장 뷰파인더가 아니더라도 WEISO 같은 자그마한 크기의 뷰파인더를 제작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50밀리 시야만 보여주는 것은 여전한 아쉬움이다. 물론 M3 같은 경우는 뷰파인더와 레인지파인더가 일체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외장뷰파인더를 사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기능적으로 큰 차이이지만 바르낙 같은 경우는 뷰파인더와 레인지파인더가 분리되어있기 때문에 어차피 눈을 옮겨서 봐야 한다. 그러니 외장뷰파인더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생각보다 적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점을 제외한다면 유일한 아쉬움은 이전 바르낙 바디 보다 몇 밀리 조금 더 커졌다는 부분이다. 이러한 변화는 뷰파인더의 크기가 커졌기 때문이다. 사실 바르낙 바디를 사용할 때의 가장 큰 즐거움은 50밀리 엘마렌즈를 침동시킨 채로 카메라 가방이 아닌 외투 주머니에도 쉽게 들어가는 작은 크기에 기인한다. 특히 II, III 같은 바디들은 매우 작기 때문에 크게 활동하지만 않는다면 양복바지의 뒷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도 있을 정도이다. 이와 비교한다면 IIIg는 단순히 몇 밀리 정도 커졌을 뿐이지만 실제 비교를 해보면 차이는 약간 크게 느껴진다. 딱 II 정도의 크기면 가장 이상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이런 건 침동식 엘마렌즈를 사용할 때의 이야기이고, 주미룩스 50밀리 1세대 렌즈라든지 주미크론 50밀리 리지드 렌즈 같은 것을 사용할 때면 어차피 상관이 없다. 아무튼 이 라이카 IIIg는 여러 장단점을 가졌음에도 가장 최후의 바르낙 바디로서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요모조모 뜯어봐도 역시나 작고 야무진 그러면서도 든든하고 믿을만한 카메라의 전형을 보여준다. M 바디에 비해서 여전히 더 작은 크기와 더욱 클래식한 외형이 아름다운 사진기이다. 늘 함께할 수 있는 이 작고 아름다운 바르낙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Gluck – Melody from Orpheus for flute
아내를 잃은 오르페오가 비탄에 빠져 슬퍼하자 사랑의 신 아모르는 이에 감동하여 그에게 아내를 살릴 수 있는 비책을 알려준다. 그것은 바로 저승세계의 지배자인 플루토를 감동시키면 그녀와 함게 그곳을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다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상으로 되돌아오기전 까지 뒤돌아 그녀를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조건을 붙인다. 이에 오르페오는 온갖 난관을 뚫고 지하세계로 내려가 플루토를 만나는데 성공한다. 시험을 통과한 그는 허락을 받고 드디어 에우리디케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온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기나긴 암흑의 계단을 뒤따라오는 에우리디케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오르페오가 변심을 했는지 의심이 들어 여러가지 질문을 하게되고 오르페오는 무심코 그녀를 뒤돌아 쳐다본다. 이에 에우리디케는 계단에서 미끄러져 지옥으로 떨어져 죽게되고 비통한 오르페오는 자살을 시도한다.
글룩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를 보면 어찌해도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 사로잡힌 그리스의 비극이 연상된다. 그럼에도 오페라의 2막 정령들의 춤에선 비극을 연상키 어렵고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이후 클라이슬러는 이 아름다운 합주곡의 주제 부분을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했고 ‘글룩의 멜로디’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다. 여기 삽입한 동영상의 경우는 드물게도 원곡 처럼 플룻으로 연주된 경우. 흔치않은 연주이지만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케가 가지고 있는 정서를 잘 표현하였다. 이 영상이 인상적인건 촬영 때문인데 일반인의 솜씨가 아닌 듯 하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마치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다.
팻 메쓰니 – Are you going with me?
스노우캣이 아직도 블로그를 연재하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진짜 오래되었는데 대단하다. 내가 이십년도 더 전에 만들었던 겨울심장이라는 이름의 홈페이지 도메인은 말레이지아의 한 여대생이 자기 개인홈페이지로 가져가버렸다.사실 그 동안 만들었다가 폭파시켜버린 홈페이지나 블로그가 진짜 많은데 이 페이스북 계정만 해도 날려먹은게 다 합치면 십수번이 넘을꺼다. 전화번호도 한 열번 넘게 바꾸었지 않나 싶다. 뭐 별 이유는 없다. 그냥 뭔가 쌓아놓다 보면 알수 없는 무의식적 알력이 그걸 날려버리라고 나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다. 아직도 여전히 허물을 부끄러워하고 있나 보다 하하.